오른손잡이어서 번번이 오른쪽이 아쉽게 잘린다.
왼쪽은 오른팔을 45도 각도로 기울여 적당히 자르기 수월한 각을 유지한 채 가위질이 가능한 반면, 오른쪽은 오른팔을 거의 수직으로 세워야 도달할 수 있는 곳에 목표물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불편해지는 각에 팔보다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이리저리 다듬다 보면 어떻게든 왼쪽과는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양손잡이었다면 훨씬 가지런하게 자를 수 있을 텐데.
머리 한번 나란히 잘라보겠다고 평생 보조로 살아온 왼손을 훈련시킬 수도 없고.
아니지, 평생 보조라고 앞으로 계속 보조라는 법은 없잖아? 지금부터라도 훈련시켜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반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용실을 가면 된다는 아주 확실한 방법은 아예 후보로도 떠오르지 않는다.
행동의 이유가 결과보다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더라도 이리저리 내 맘대로 머리를 잘라보는 시간이 나에게는 마치 성인이 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 미술시간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 하나뿐인 재료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가며 원하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 주는 쾌감과 스릴이 있다.
자를 때 서걱 거리는 촉감과 싹둑 잘리는 소리는 웬만한 힐링 사운드 못지않다. (무려 라이브이기까지 한!)
이렇게 다 좋은데 딱 하나 아쉬운 것이 그 부족한 마무리이지만
그마저도 그 덕분에 더 나아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남아있다.
과정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그 삐뚤빼뚤함마저 사랑스럽게 보인다.
이 긴 문장들을 한 단어로 요약해 봤다. 참으로 인간적인 마무리라고.
작년 여름 길이 맞추기에 무한도전을 하다 바리깡을 사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로 짧은 커트를 만들어버린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또 머리는 쑥쑥 자라 단발을 쳤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더 짧게 자르는 것은 여름을 위해 남겨두었다.
다음에 찾아올 즐거운 미술시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