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건강과 행복이 항상 서로 불가결한 조건은 아님을 알게 된다.
아플 때는 건강만이 나에게 유일한 행복을 가져다줄 무엇처럼 느껴지고
건강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 다시 꼭 어딘가가 아프게 되는
그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는데,
30대를 넘어가며 여기저기 자잘하게 때로는 크게 아픈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가져오다 보니
만약 건강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이대로 내내 불행해야 한단 말인가?
아픈 것도 서러운데 행복마저 뺏기고 싶지 않아!
하는 제법 분연한 현실 자각 각성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누군가 행복의 조건을 적어보라고 했을 때 여전히 돈과 가족과 친구 등등은 적어 내려 갔어도 '건강'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추가하지 않게 되는 패기(?)도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정신 승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 바로 마감을 하는 그 순간이다.
나의 직업인 애니메이션은 정말 지독히도 1 더하기 1 더하기 1을 더하는 일이라
실로 그림 그리는 업종 중에서도 꼽히는 노가다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는 이게 좋았다. 이렇게 정직한 작업이 있을 수 있다니.
예쁜 그림 한 장 그리는 것도 좋은데, 그 예쁜 그림을 수천 장 그려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니!
그것이 내가 애니메이션과 사랑에 빠진 포인트였는데
육신은 나이가 들고 마음은 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E여...
그래도 아직까지 내 작업이라면 여전히 도파민이 더 많이 분비되는 편이라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그리는데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외주라면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다.
이 무식하게 성실한 작업이 내 어깨와 허리와 엉덩이와 발까지 압박해 대면
제발 나를 이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줘 그 간절한 마음 하나만으로 마감만을 바라보며
흡사 고행을 수행하는 원죄자가 된 것처럼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꾸역꾸역 쳐낸다.
그리고 드디어 최종 파일을 넘겨줬을 때.
그 순간은 정말.
행복 그 자체.
육신은 너덜너덜해졌지만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
새삼 글로도 그림으로도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기분을
그나마 근접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주신 거장 감독님들에게도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오늘도 1일 1글을 마감하여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