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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글그림 Oct 15. 2023

244화. 평화로운 아침


































마치 굉장히 오래 떠나 있어야 할 여행을 당일 새벽에 날벼락같이 통보받은 기분이었다.


더 대책 없는 것이 돌아오는 날을 알 수 없거니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면 나는 뭘 준비하고 뭘 챙겨가야 좋을지.

한 번도 실제 전쟁은 경험해보지 못한 머리가 적당한 데이터 베이스를 찾지 못해 계속 공회전하고 체험된 기억이 없는 몸은 평상시보다 더 굼뜬 게 느껴졌다.


그래도 요즘같이 미사일 한방이면 다 죽는 시대에 30분이 넘도록 아직 무사한 걸 보니 내가 운이 좋거나

미사일이 떨어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는 않나 보다 하며 침착하게 방을 둘러보는데

역시 첫 번째로는 생명들이 눈에 밟혔다.

 

우리 강이는 15일 안에는 물을 줘야 하는데. 내가 15일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이미 미사일이 떨어져 건물이 다 부서진 상태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건물의 천장이 사라졌으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을 수 있을 테고 부서진 잔해 속에 뿌리를 내려서 살아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버틴다고 해도 동물도 아닌 식물은 누가 구조해 주지도 않을 텐데... 무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도 봐야 하는데...


그리고 일은 다음으로 떠올랐다.

내년 3월이 마감인 작업.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계약서에 천재지변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전시는 정말 특수한 상황이니 칼같이 맞추라고는 하지 않겠지. 그림이야 뭐 내가 살아있으면 언제든 다시 그리면 되니까 이 기회로 마감이 늦춰진다면 오히려 좋아가 될지도 모르고. 역시 작업을 위해서라도 나를 잘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 이제 더 늦기 전에 피신 가방을 싸 보자 싶은데 그날따라 집에 간식거리 하나 없고, 옷은 또 뭘 챙겨가야 할지 모르겠고.


다시 머리가 총체적 난국에 빠지려 하기에 그전에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가장 분명한 일 하나, 블라인드 걷기를 하자 하고 일어나 창을 걷어 올리는 중에 두 번째 알람을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이 해프닝이었다고.


짧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많은 일이 일어났던 아침.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예방주사처럼 세게 맞았다가 금새 잊고 대충 살며 후회하기를 반복하고는 있지만 잊었을  사라진 것은 아닌 나의 평화들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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