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작업을 끝냈다.
계절로 치면 겨울이다.
가지를 떠나버렸던 푸른 잎사귀들을 기다리듯이 집 나간 마음을 기다리고 있다.
항상 작업 후반 즘에는 안 좋아지던 건강을 염려하여 쫓기는 와중에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썼는데
작업은 당연히 1순위였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걷는 것도 다 1순위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루틴의 후발주자였던 글쓰기가 밀려났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끄적였던 글과 지금 쓰고 있는 글은 다르다.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초등학교 때는 단짝이었으나 30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서먹하고 낯설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좋을까. 그래도 우리 중간에 한번 연락했잖아. 그동안 별일 없었지? 별일이 없었겠니.
마감이 다가와 조금씩 숨통이 트이면서 마침 예약을 해 두었던 책이 대출이 되어 책을 한 권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루키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1Q84였고 그 이전에도 한 두 작품은 재밌게 읽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 외에 신간을 찾아본다거나 최근에 어떤 작품활동을 하고 계신지에 대한 정보도 전무했는데, 작업에 지쳐서 어느 정도 가볍게 읽을 에세이를 찾다가 발견하곤 반가워 예약을 해 두었던 것이었다.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이 마라톤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마라톤을 뛰어본 적은 없는데 작가님이 회고록에서 밝히신 많은 부분이 내가 작업을 하는 방식이나 알게된 가치들과 닮아 있어서 놀라웠다. 마침 긴 레이스를 막 끝낸 내게 이 책이 온 것도 새삼스럽고. 보이지 않지만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는 별개라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은데 그래도 누군가는 이렇게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서 나 같은 사람에게도 위안을 주는 책을 써주시는구나. 참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그것을 알게 해 주니 글은 참 좋은 것이지 않은가. 역시 서먹해지긴 했지만 다시 친해지고 싶다. 글과.
백지를 정갈하게 다듬고 기다린다.
저 멀리 돌아오는 마음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