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으로 돌아온 데이빗은 그동안 봐왔던 표정 중에 가장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어요.. 아니, 그보다 앞으로 회사에서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걱정이네요.."
데이빗은 마치 이 모든 일이 본인 때문인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들을 계속했지만 사실 이번 일의 어떤 부분에서도 데이빗의 책임은 없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계획했던 일들을 이루지 못한 것뿐이지 무슨 죄를 지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생각처럼 순탄치가 않았다.
회사 측에 우린 이미 무슨 쿠데타라도 일으키려 한 반란군이 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처분들(?)이 있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들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우리 매장은 처음 주동자가 둘이나 있었으며, 그 둘 다 매장에서 중간관리자까지 맡고 있었기에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던 당시 나는 매장에서 'CONTROLLER'라는 직무를 맡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각 매장엔 인사, 회계, 영업점 영업관리시스템 관리, 매니저팀 및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일종의 사무직과 비슷한 업무담당자가 있을 때였고, 출근시간도 다른 직원들보다는 빠른 영업 준비 전에 출근을 하는 게 일반적인 직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평소와 다를 게 없던 어느 날, 점장님께서 퇴근 후 면담을 요청하셨다.
퇴근도 다른 직원들보다는 빠른 시간이었기에 마침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고, 그렇게 점장님과 함께 경쟁사를 방문해 비싼 스테이크까지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 비싼 스테이크가 우리 앞에 놓이는 순간, 점장님께서 어렵게 얘기를 꺼내시기 시작했다.
요지인즉, '허니 캡틴은 잘못한 게 없다. 다만 회사에서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부당한 처분을 받을 수는 없지 않으냐, 그러니 가입원서 작성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지금이라도 탈퇴를 하겠다는 각서만 하나 써달라'는 것.
하지만 듣는 내내 이상했다. 실상 우리의 설립 신고는 무산이 됐고, 나는 분명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회유를 받아야만 하며, 더욱이 이런 얘길 꺼내는 점장님도 이게 본인 의사가 아닐 텐데 왜 이런 상황을 강요받아야만 하는지,
이런 과정들이 전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그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회사의 어떤 대응도 괜찮다는 약간의 객기까지 부렸다. 이게 나 하나만 지나가면 되는 그런 일인 줄 알고 말이다..
점장님과의 면담 다음날,
당시 '맛이 즐거운 곳'의 각 매장엔 'REDBOOK'이라고 하는 빨간 표지의 매니저팀 커뮤니케이션북이 있었다.
매니저팀 외엔 유일하게 'CONTROLLER'만이 'REDBOOK'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날도 매출 기재와 전달사항 확인을 위해 'REDBOOK'을 펼친 순간, 페이지 중앙에 커다랗게 쓰인 점장님의 메시지를 먼저 볼 수가 있었다.
'매장 관리의 소홀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금일 부로 퇴사합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가 어제 그 각서를 써드렸더라면 점장님이 회사에 남으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점장님이 이렇게 된 게 마치 나 때문인 것만 같았고, 회사에서 해고를 할 순 없었을 테지만 분명 엄청난 압박이 있었을 테니까.. 주동자를 둘이나 놓고 점장을 무얼 하고 있었냐, 책임을 져라, 하며 시시때때로 사람을 끝없이 괴롭히지 않았을까..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더욱이 20년 전의 일이었으니...
결국 점장님은 그렇게 회사를 떠나셨고, 금세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 뒤로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 정기인사 시기도 아니었던 늦가을의 어느 날,
예고에도 없던 갑작스러운 인사발령공문이 내려왔다. 데이빗을 포함한 최초 주동자 서너 명이 하루아침에 연고지도 아닌 현재의 근무 매장과 거리도 먼 타 지역의 매장으로 내일 당장 발령이 난 것, 사람을 자를 수는 없으니 세상 치사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인사발령 대상에 내 이름이 없는 게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의아함을 가진 채 사내메일로 인사발령을 확인하고 있던 그때, 새로 오신 점장님이 말씀하시길,
"허니 캡틴 인사발령도 곧 내려올 거야, 대전 유성 신규 매장에 NSO(오픈 지원 및 교육팀)로 신청해 놨으니 준비하면 돼"
새로 오신 점장님은 다행인지 과거 매니저 시절에 함께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회사의 블랙리스트에 내가 있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다른 동료들처럼 하루아침에 여의도에서 대구로 출근을 하게 될 뻔했으나(이건 그냥 나가라는 소리임), 마침 신규 매장 교육팀을 구성하는데 점장님께서 나를 추천해 주시면서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나는 어차피 서울도, 대전도 연고지가 아니긴 했으나 마침 친한 친구가 대전의 기존 매장에 있는 걸 아시고는 점장님께서 애써주신 덕분에, 갑작스레 매장을 대전으로 옮기게 되긴 했어도 발령 사유나 모양새가 다른 동료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 된 셈이다.
그렇게 몇 주 전,
마포의 민주노동당 사무실에 함께 모였던 우리들은 가까운 수도권에서 전국의 매장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으며, 물론 그중 다수가 흩어지기 이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루아침에 여의도에서 안양으로 발령이 난 데이빗은 꿋꿋이 출근을 이어갔으나 심한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전의 신규 매장 오픈을 준비하는 동안 그곳의 지점장은 내가 노동조합을 만들다 온 문제아라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인사조차 받질 않았다.
뭐, 그렇다고 내가 기가 죽거나 내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무사히 오픈을 마치고 신규 매장에 잔류하여 관리자까지 하며 그렇게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회사의 어용노조에 앞장섰던 우리들의 밀고자가 전국의 매장을 돌며 노동조합에 관한 설명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라며 매장을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서비스매니저를 맡고 있을 때였고, 드디어 그들이 우리 매장에 오기로 한 날,
'그렇다면 내가 또 기꺼이 맞아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매장 출입문에서 그들을 마주하던 순간의 그 표정들(밀고자는 두 명이었다)이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세상 떨떠름한 채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어 하던..
"아이고, 매니저님,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배경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챠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