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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Jan 02. 2022

랍스터는 먹을 줄 알았지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되어가는 시기에 관하여

어릴 때부터 나는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내성적인, 수줍음이 많은, 낯을 가리는, 이런 단어가 나를 표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간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던 날 난 개인 달리기로 1등을 했다. 같은 반 학우들이 달리기를 잘한다며 나를 치켜세우는 와중에도 난 땅만 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 2등을 한 아이가 “내가 일부러 져 준거야. 그렇지, 슬기야?”라고 했는데도 난 여전히 땅을 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아닌데?”라고 말할걸, 생각했다. 게다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기억 한켠에 남아있는 걸 보면 뒷북은 잘 치는 성격이다. (아님 뒤끝이 있던가.) 


성격이 그래서 난 늘 반에서 둘셋 정도의 친구만 사귀었다. 새 학기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내내 은주는 내 베스트프렌드였는데, 우리는 2학년 때 신발장에서 나눈 대화를 계기로 친해진 후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하교 후에도 자주 놀았고 서로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가곤 했다. 


베스트프렌드 앞에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안전하다 생각했다. 친숙하다고 믿었기에 맘에 들거나 들지 않는 게 있다면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하지만 내성적이라고 해서 배려심이 많은 친구는 못 되었다. 나는 속이 좁았고 사소한 거에 삐치기도 잘했고 질투심도 많았다. 은주는 내 비좁은 마음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사실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눈에 띄는 2차 성징이 멈춘 지점에서 엇비슷하게 내 곁에 머무는 친구도 제자리걸음인 듯했다. 학창 시절 내내 무언가 결핍된 감정이 내 곁을 맴돌곤 했다. 


스무 살이 되었고 대학을 들어갔고 새로운 동기들을 만나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 웃고 마시다 보면 아무 생각도 없이 즐거울 수 있었다. 대학가, 시내 술집은 연일 대학생들의 파티였다. 지금 떠올려보면 무슨 말을 나눴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시시콜콜한 일상다반사가 전부였겠지, 짐작한다. 그런 것들이 생활의 활력이던 시절, 이성과의 연애만큼 진지하고 심각한 얘기는 없던 시절이었다. 


이십 대 때는 새로운 만남도 잦았지만 오랜 친구와의 인연도 돈독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터라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런 향수를 나누는 일은 왜인지 몰라도 따뜻한 힘을 주었다. 동네 싸구려 호프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습관처럼 핸드폰 액정에만 갇히지 않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눈을 맞추었기에 함께 있으면 충만함을 느꼈다.


갓 어른이 된 이십 대의 우리는 빠른 변화 속에 있었다. 첫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고, 학업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바다 건너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밥벌이를 고민하며 고시원에 들어가기도 했고, 첫 자동차를 장만했다. 일상의 무기력에 지쳐 퇴사를 결심하기도 했고, 부모님 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수많은 연애의 시작과 끝은 굳이 말 안 해도 당연하게 반복되었고. 


당시 대학 생활, 가족, 애인과의 이슈 말고도 간혹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군대 제대하면, 대학을 졸업하면, 유학을 마치고 나면, 시험에 붙고 나면…. 우리는 저마다 하고픈 꿈이 있었다. 그것은 직업이기도 했고 그저 좋아하는 취미나 사랑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우리의 계절은 희망과 낭만이 가득했다. 눈앞에는 흔해 빠진 맥주잔에 맥주 거품이 자글거렸고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싸구려 과자를 집어먹으며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뀔 순간을 그려보았다. 그날이 오면 야경이 비치는 호텔에 룸을 잡고 와인 잔을 부딪히며 연말연시를 함께 보내고 있겠지,라고. 


“야야, 우리 30대가 되면 어느 정도 커리어도 쌓이고 돈도 많이 벌고 있겠지?”

“당연하지. 지금보다 여유가 넘칠 거야!”

“비싼 호텔도 막 예약할 수 있고 랍스터 정도는 예사로 먹지 않겠어?”


한번은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누가 먼저 결혼하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친구들은 가장 결혼에 관심 없는 나를 뽑곤 했다. 원래 관심 없다고 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가는 거라고. 아무튼 각자 가정을 꾸리면 그땐 또 가족 단위로 함께 휴가를 보낼 수도 있겠다며 상상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서로 시간 한 번 맞추기가, 모두가 다 모이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우리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스무 살 언저리에 꿨던 꿈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른들이 정해준 길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가던 길을 돌아 나와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친구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상황 속에 각자의 경험치가 늘면서 유년 시절의 추억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모두가 여유롭고 안정적인 삶을 찾아가진 않는다.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은 딱 그 순간이 와야만 가능하다. 절대 그전에는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이십 대 때는 그랬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랍스터는 먹을 수 있는 삼십 대가 기다릴 거라고. 삼십 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흔들리고 방황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거라곤 이십 대 때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왜 하필 랍스터였을까. 그땐 비싼 음식이 고급스럽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 걱정하지 않고 친구와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훌륭한 음식이다. 이런 생각 또한 삼십 대가 되어야만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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