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코로나19 #삶의방향성 #각자의정의
지금껏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선택지를 마주한다. 내가 가진 능력, 주어진 환경, 그동안의 경험치와 같은 변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거나 포기했다. 퇴사한 후 취업하지 않기로 맘먹은 것도, 집을 나와 ‘혼삶’을 시작한 것도,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 모두, 결국 나의 의지로 행했다. 가끔 이런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도 든다. 비교대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큼 큰 고통이나 불행 없이 그럭저럭 원하는 선택이나 포기를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의 비율을 늘려왔다. 나의 삶은 제법 순항 중이구나, 싶다.
최근 한 시민극단에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취미로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어왔던 나다. 이번에 부산에서 주로 청년들이 모여 활동하는 ‘물음피(?P)’라는 극단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9월 3일부터 일터소극장에서 공연 예정인 <정의(正義, Justice)>라는 창작극에서 나는 정의론을 가르치는 교수 역을 맡았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설파하기 보다는 완벽한 정의란 있을 수 없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선택한 것 자체보다 그 선택을 왜 했는지를 더 중요시 여기는 인물이다.
희곡이라는 이 허구 속에는 가상의 인물, 사건, 배경이 어우러져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맡은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그 인물의 지문과 대사, 행동 들 이면에 감추어진 감정이나 태도, 그 인물이 가지고 있을 법한 배경 등을 생각해야 한다. 내용을 이해하고 상대역을 맡은 배우와 교감하며 작품을 잘 만들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한다.
작품에 대한 고민과 집중이 늘어날수록 극 중 사회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의문이, 자주 들었다. 극은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현재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전례 없던 기나긴 장마, 매년 높아지는 폭염과 같은 기후변화는 특히 더 닮아있다. 사회적으로 논란되는 여러 이슈도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소설이나 희곡은 현실세계를 담고 있는 축소판과 다름없다.
내가 맡은 교수라는 역할도 그렇지만, 다른 등장인물들도 저마다의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싸운다. 연극에서는 정해진 배역에 따라 정의를 외치지만, 현실에서 나의 정의는 무엇일까. 나에게 옳은 행위란, 나에게 행복이란, 나에게 자유란, 나에게 도덕이란….
유독 코로나 사태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금, 이 질문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코로나 사태로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허망함이 가장 크다. 내 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경상도식으로 말하면 ‘천지삐까리’다. 나의 경우, 강의가 연기되는 건 물론, 준비하고 있는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이다.
어쩌면 ‘원래’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라고 믿고, 그래야 내 삶의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는 것. 아무나 맘먹을 순 있어도 누구나 하진 못하는 일이다. 그것을, 어쩌면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박탈당하는 기분은, 허무 중에도 가장 큰 허무다. 생계를 해결해주는 일감인 강의가 취소되는 건 그에 비하면 이젠 담담하달까.
나의 정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포기하는 자발성에 있다. 다른 사람이 믿는 정의 때문에 나의 것을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비단 지식인만의 의무가 아니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묻힌다. 내가 아직 나보다 더 약자인 타인을 도울 깜냥은 안 되지만, 적어도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진 않으려 한다. 그래야 나의 자유의지도 보장받을 테니까.
사람들을 잘 만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 하는 지금, 우리가 어릴 적 도덕심으로 익혔던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상기했으면 좋겠다. 부디 이 시기가 슬기롭게 지나가기를.
국제신문, 청년의 소리 칼럼 2020.8.2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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