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아침 공기는 선선했지만, 서영의 걸음은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다.
'느림의 미학 캠프'라는 말이 귓가 어딘가에서 계속 울렸다.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거 보면 가고 싶은 마음이 큰데,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커서 계속 가고 싶은 마음을 부정한 거 같다. 그리고 자신이 빠져도 아무 상관이 없을 거 같은 그들의 분위기가 더 마음에 구렁텅이로 끌고 내려갔다. 마치 타고 갈 버스에 내 자리가 비어 있는 그림이 자연스럽다는 듯 캠프를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상상되어 더 그런 거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애석하게도 벌써 학교 건물이 점점 시야에 들어온다.
문득, 캠프 얘길 들었을 때 스쳐간 산과 하늘이 다시 떠올랐다.
서영은 그런 마음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아니야,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세 친구가 나란히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바람을 타고 온 스피커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쉰 후 다시 걸었다.
그 순간 송현이 먼저 서영이를 발견하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송현 : 아, 서영아! 잘 잤어?
서영 : (잠시 뜸을 들이다) :응... 뭐"
현서도 송현이와 함께 살짝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너무 들이대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렇게 서 있었다.
그 옆에 영인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짧은 인사를 하고 서영은 가방끈을 고쳐 메며 세 친구를 스쳐지나 교실로 향했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묘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점심시간 급식실]
학생들은 급식실에서 식판을 들고 나와 여기저기 흩어져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현서, 영인, 송현은 창가 쪽에 모여있고, 서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다.
송현 : (밝게) 야, 캠프 사이트 좀 보고 있었는데, 진짜 괜찮더라! 밤에 별이 진짜 은하수처럼 보인대!
현서 : 와.. 나 거기서 그림 그려보고 싶어
영인 : 프로그램도 괜찮더라. 캠프에 가있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겠던데?!
송현은 서영이 혼자 서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본다.
송현 :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여기 서서 뭐 해. 밥 먹으면서 캠프 이야기하자. 너 지난번에 일정 궁금하다 했잖아. 사진 좀 볼래?
서영 :... 내가 궁금하다고 한 적은 없는데.
잠깐 어색한 정적이 흐르지만, 송현은 서영에게 웃으면서 앉으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보여준다.
사진에는 푸른 잔디밭, 작은 캠프파이어 자리, 숲길이 담겨있다.
서영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본다.
현서: (작게 미소 지으며) 서영아, 우리 다 같이 가면 진짜 좋을 텐데..
서영은 말없이 식판을 들고 자리를 옮기지만, 표정은 어딘가 부드러워진 듯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영인은 어딘가 못마땅해 보였다.
영인 : 언제까지 저럴 거래?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 까지 해야 해.
현서 : 다 같이 캠프 가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서영이가 우리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몰랐어. 그래서 서영이가 급발진했을 때 좀 놀랐단 말이야. 그날 이후로 우리는 캠프이야기만 하기도 했고.
송현 : 맞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잖아.. 일단은 도서관 가서 공부하면서 생각해 보자. 시험이 곧이니까.
[기말고사 전, 학교 도서관]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도서관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현서와 영인은 각각 분제집을 펴고 집중하고 있었고, 송현은 친구들을 격려하며 자리를 잡았다.
서영은 친구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었다. 문제를 푸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미간이 찌푸려지고, 집중이 안 되는 듯 땅만 바라보고 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현서가 다가왔다.
현서 : 서영아 무슨 문제야? 도와줄까?
서영 :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응... 이 부분이 좀 헷갈려서... 같이 풀어줄 수 있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인도 서영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제대로 대화도 하지 않은 채 도망 다니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옆에 두는 서영이의 모습이 괘씸했다.
영인 : 도움 필요할 땐 잘도 고개를 끄덕이네. 우리랑 말 섞는 건 싫어하더니.
(당황해하는 현서와 표정이 굳은 서영)
정적이 흐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영인은 짜증이 났다.
영인 : 우리랑 사이좋게 지낼 마음은 있고? 대화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잘 지낸다는 거야. 누가 보면 우리가 머 엄청 잘못한 줄 알겠다. 네 열등감에 왜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해? 우리는 뭐 고민도 말 못 해?
서영 : 쪽팔려서 그랬다 왜. 내 열등감이 너희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서, 서먹서먹한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고. 캠프이야기하는 너희들 보면서 내가 없어도 너희는 잘 다녀올 거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영인 : 이제야 말을 하네. 담아두면 누가 알아주냐?. 말을 해야 알지. 며칠 동안 우리가 너 눈치 보니까 좋았어?! 계속 같이 가자고 신호를 주는데 너 뭐 돼?. 우리가 너 밑에 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너한테 받아야 해? 우리의 배려가 너한테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었어? 그래?
서영 : 그런 뜻은 아니었어.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지 절대 너희를 내 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미안해. 서먹서먹한 정도라고만 생각해서 다가가지 못했고, 너희를 절대 내 밑으로 보고 그런 거 아니야.
영인 : 그럼 이제라도 대화해. 숨는 건 오해만 크게 키울 뿐이야. 나도 그때 너 서운하게 한 거 미안해.
서영 : 아니야. 내가 더 너희들한테 미안하지.
송현 : 에헤이~~ 분위기 좋은데~~~
현서 : 나도 미안해 서영아.
모두의 미안해 타임에 장꾸모먼트를 보인 자신이 살짝 부끄러워져 곧바로 송현이도 서영이에게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한 거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대화로 풀면 되었는데,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사과하는 게 어려웠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성장에 한걸음을 띈 느낌이다.
그제야 서영이는 웃으며 잘 안 풀리던 문제를 영인에게 물어봤다. 넷 중 수학을 가장 잘하니까!!
영인 : 어때 이렇게 하면 잘 풀리지?!
현서 : 역시는 역시다. 나도 한 수 배웠다.
서영 : 알려줘서 고마워.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거 같아.
영인 : 원래 혼자 붙잡고 있으면 괜히 더 꼬여. 물론 정승제 생선님은 충분히 포지 하지 말고 풀어보라고 했겠지만 말이야. 서로 모르고 그러면 물어보고 답해줄 수 있는 거지.
가만히 친구들을 바라보던 송현이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점심시간이 끝나간다며 친구들을 데리고 반으로 돌아갔다. 교실로 향하는 네 친구들의 뒷모습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그 웃음 속엔 묵은 감정이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이후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 준비로 모두가 학원 수업이 없는 날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서로에게 피드백해 주는 소리와 책상 위에 펜 소리, 그리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렸다. 공부를 잠깐 쉬고 창밖을 바라볼 땐,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