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진 만들기 키트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누름돌은 꼭 누름돌이라 불러줘야 제 맛이 났다. 왜냐, 진짜 돌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여행지에서 하나 둘 챙겨 모아 온 돌.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돌. 그 돌을 깨끗이 닦아내 직접 손뜨개로 옷까지 입혀주었으니 탐이 날 법도 했다.
갖고 싶단 마음은 표현하지도 않았다.
진한 바람이 전해졌던 걸까? 그림책 모임 회원 한 명이 그녀의 누름돌을 갖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우리 모두의 누름돌을 준비해 왔다. 오전에 잡힌 성북동 도보 투어를 하는 내내 배낭 속에 이고 지고서. 아무리 작은 돌멩이라 하더라도 일곱 명의 몫은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그녀
걸음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그녀가 누름돌을 배낭에서 하나둘씩 꺼낼 때마다 우리는
‘와~~~’를 끊이지 않고 뱉어냈다.
없는 취미 중에 유일한 취미가 필사하기다.
책을 읽어도 흩어지기만 하는 기억을 붙들고 싶어
시작하게 된 취미다. 요즘은 캘리그라피 회원들과 하루 한 편의 시를 필사하고 있다.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 524페이지의 위엄이 느껴지는 벽돌 같이 두꺼운 시집이다. 필사를 할 때마다 두꺼운 책이 들썩여신경이 쓰이다 못해 매번 곤욕이었다.
바로! 이때가 누름돌이 필요한 순간이다.
누름돌은 한 글자씩 음미하며 쉬엄쉬엄 써내려 가라고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외출 시 미리 나가 엘리베이터를 붙잡고는 빨리 나오라 재촉하는 남의 편 님과는 차원이 다르다. 순간을 영원처럼 붙들어 준다. 참 기특하고 예쁜 존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크기. 설레는 파스텔 핑크 옷을 입은 내 누름돌. 마음에 쏙 들어 사실은 데코 용으로도 촘촘히 사용한다. 사진 찍을 때 슬쩍 옆에
놓고 찍으면 없던 생기도 살아난다. 요즘 이 작은 돌
하나 때문에 미소 짓는 날이 잦아졌다.
그녀의 누름돌에 온 마음을 빼앗겨서였을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상상의 누름돌'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상상의 누름돌'을 놓아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다음 날이면 바람에 모두 흩날려 버릴까 하는 마음에 살포시.
마음에 쏙 드는 시 구절을 운이좋게도 발견한 날,
깊이깊이 음미하고 싶은 마음에 살며시.
사춘기 아들의 활짝 미소를 본 날,
함께 오래오래 웃음 짓고 싶은 마음에 사뿐히.
이런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때면 그냥 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상상의 누름돌’을 슬며시 꺼내본다. 찰나의
순간 위에 살짝 올려보고는 반추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본다.
며칠 전에도 '상상의 누름돌'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라디오 여성시대 신춘 편지 쇼에 사연을 보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무심히 틀어 둔 라디오에서 내 사연이 흘러나왔다. 마감을 일주일 앞두고 미리 도착한 응모작 중에서 몇 편을 읽어 주는 거라 했다. 내가 보낸 사연에 양희은, 서경석 씨의 목소리가 입혀지니 묘한 기분은 배가 되었다. 사연이 흐르는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몽신한구름 위 황홀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실시간 톡방이 시끌시끌했다. 사이버 수사대에 의하면 블로그에 이미 똑같은 글이 올라와 있다는 거다. 맞다.
그 네이버 블로그 주인이 나다. 필명을 사용한 바로 나다. 그러니 난리법석 톡방의 원인 제공도 역시 나다.
표절이라는 단어가 오르락내리락했다. 표절이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힘은 막강했다. 강펀치를 한 대 후려 맞은 것 같았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아... 나의 누름돌. 누름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들썩이는 심장을 누름돌로 꾹 눌러 진정시키고 싶었다.
와중에는 본인이 올린 글일 수도 있으니 억측은 하지 말자는 백만 번 맞는 말의 댓글도 올라왔다. 고마운 댓글에 조금 진정이 되나 싶었는데, 이번엔 염장을 지르는 댓글이 또 올라왔다. 미리 소개된 글 중에서는 역대 수상작이 없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잦아들었던 심장이 콩닥콩닥 콩콩콩.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한마디 댓글에 다시 나대는 심장을 보고는 눈치챘다.
나... 내심 수상을 기대하고 있나 봐. 그 사람 말이 맞을 법도 하다. 라디오 사연은작가님들이 선별해서 방송을 타게 된 것이고, 신춘 편지쇼는 엄연히 심사위원들이 따로 있으니 말이다. 아... 다시 누름돌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