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로 라면을 싫어하는 나다. (라면 러버들에게 테러당할라...) 20대 때도 라면을 한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다. 라면 = 안 좋은 음식이란 생각이 가득했으니까.
아침부터 해장을 편의점 라면으로 하는 직장 동료를 보며 기겁했고, 남자친구(지금의 남편. 굳이 밝히는 이유는. 남편이 내 브런치를 구독하고 있다.)가 장을 본다며 라면을 종류대로 담을 때 한번 더 기겁했다. 결혼을 해서도 끼니로 라면을 먹었던 적은 드물었다. 남편은 라면 한 번 먹으려면 내 눈치를 봤다. 이게 뭐라고 내 허락이 떨어질 때만 먹곤 했다. 지금도 주말에만 먹을 수 있는 우리 집 주말 특식 메뉴다.
이랬던 내가 라면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 가을. 아니! 추석연휴. 우리 세 식구는 시댁인 춘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날 밤 일찍 출발하자고 다짐을 했건만. 남편은 왜 이리 늑장을 부리던지. 몸을 뒤척이며 5분만 더를 몇 번이나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계획했던 시간에서 30분 늦게 출발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은 지옥 불을 경험하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
차가 막혀도 그렇게 막힐 수가 없었다. 네비는 애초부터 국도로 안내했다. 남편은 차량용 네비와 핸드폰 네비를 번갈아 보며 본인이 자초한 일을 만회하려 했다. 그러길래 졸린 눈을 번쩍 좀 떠주지! 이상하게도 자기 집 갈 때는 한결같이 느긋한 나무늘보가 된다. 그가 바늘방석에 앉아 찔끔찔끔 앞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나였다.
아침부터 모닝커피를 들이켰던 탓! 방광은 2시간이 지나자 바로 신호를 보냈다. 다리를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또 한 번 꼬았다. 의도적으로 딴생각을 하며 버텼다. 그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꽉 막힌 도로를 향해 짧은 목을 기린처럼 쭉 뽑아 전방을 응시했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물론 나에게는 천리 길, 황천길이었다.) 빠지는 길이 있었다. 우리는 낯선 시골 마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름답게도 나의 구세주 편의점이 있었다!
중대한 볼일을 마친 나는 미친 x 마냥 방긋방긋 웃어댔다. 기분은 상쾌했고, 하늘도 나랑 같은 마음인 듯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내 기분을 간파한 우리 집 두 남자는 이기는 게임 판에 손을 얹었다.
그것인즉슨 편의점에서 라. 면. 을 먹고 가자는 것.
한껏 업 된 나는 하늘 높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눈을 찡끗하며 오케이를 외쳤다. 처음엔 먹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점심때가 다 되었고,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던 터.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라면을 고르고 있었다.
난 접하지 않았던 참깨라면을 골랐다. 아이는 양을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왕뚜껑을 집어 들었고, 남편은 빈 속이어서 그런지 심심한 튀김우동을 선택했다.
난관에 부딪칠 줄 알았던 라면 먹기 여정 첫 관문을 쉽게 통과해서였을까. 그들도 허허실실 대며 나보고 초록 파라솔 아래 자리 잡고 앉아있으라 했다. 햇살은 쨍쨍했고, 바람은 살랑였다. 곧 그들은 커다란 박스 안에 물을 부은 컵라면을 들고 등장했다. 남편은 미안함을 만회하려는 듯 라면에 사랑 톡톡! 달걀까지 넣어왔다. 허기져서였을까. 나는 4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한 젓가락 했다. 말이 그렇지 때 이른 라면은 과자에 가까워 와작 한 입 베어무는 격이었다.
그런데 웬걸. 지금까지 라면을 거부했던 나를 원망하는 맛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뚜껑을 일찍 벗겨내니 자연스레 바삭 면 _ 꼬들면_ 푹 익은 면 모두를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 천국의 맛 이로구나~ 거기다 함께 사온 볶음 김치는 어찌나 라면과 찰떡궁합이던지. 나중에는 모자라 한 봉지를 더 사 왔다.
아무튼 그날 이후 라면에 대한 마음은 무척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그렇지! 컵라면 두 상자를 사다 주다니!
얼마 전 코로나로 몸져누웠다. 입맛도 없고, 살을 도려낸 듯 목이 어찌나 아프던지. 기침은 또 얼마나 나오던지. 컥컥 뱉어낸 쓰레기가 금방 한 봉지 되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한참 먹성 좋은 사춘기 아이 간식이 걱정 됐다. 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주문했다. 그것을 보고 남편은 내가 먹고 싶어 시킨 줄 알았단다. 그 길로 나가 컵라면을 두 상자나 사들고 왔다.
오 마이 지저스!
그 후 나는 남편에게 참 예쁜 말(?)을 폭포수 쏟아지듯 뱉어냈다. 보양식을 사다 줘도 날까 말까 한 판에 라면 두 상자라니. 에효. 정말이지 인후염이 너무 심해 음식을 삼키기도 싫었던 터였다. 내 침 삼키기도 힘들었으니 말해 뭐 하겠나. 그러니 라면은 더더욱 땡기지 않았다. 아이도 그 라면에는 도통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 거라고 네임텍을 붙여 놓기라도 한 듯.
그리고 오늘.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폭우가 바이러스를 싹 다 쓸어간 듯. 몸은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작스레 좋아졌다. 입맛이 돌았다. 비 오는 날은 라면이 딱이지. 어느새 내 손은 컵라면을 꺼내고 있었다.
육개장 사발면, 김치 사발면, 진라면 순한 맛. 행복한 고민에 들어갔다. 선택의 시간. 라면 세 개를 올려놓고 한참을 째려봤다. 두 그 두 그 두 그~~ 인고의 시간 끝에 김치 사발면이 간택되었다. 와작와작. 생 라면 수준으로 시작해 후르릅, 쩝쩝 면치기를 하며 흡족한 마무리를 지었다. 땀이 뻘뻘 흘렀다. 그날 그 편의점에서 먹었던 그 컵라면이 생각나는 오늘이었다. “타이밍이 아쉬웠던 남편아, 라면도 타이밍이다. 응? 오늘은 내가 아주 맛있게 먹어 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