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직도 산타를 믿는다는 다 큰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고학년 중에 최고 학년인 6학년 어린이가 말이죠. 주변에서는 다들 말도 안 된다며 거짓말이라고 하죠. 저도 아이가 언제까지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지했거든요.
새해가 시작되면 달력을 들춰가며,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크리스마스를 가장 먼저 불러내던 아이였습니다. 12월이 마치 첫 달인 것 마냥요. 자기 생일이나 어린이날, 소풍 같이 신나는 다른 날들을 제처 두고 말이죠.
12월 1일만 되면 꼭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산타 선물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었죠. 반듯반듯한 글자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목록. 창밖에서 글씨가 잘 보이도록 글씨 면을 밖으로 붙여두곤 했답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읽으시기 편하게 말이죠.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산타 할아버지를 위한 진저 브레드 맨 쿠키를 만드느라 분주했어요. 물론 아이는 쵸코 펜으로 데코만 했어요. 전적으로 쿠키를 만드는 건 엄마 몫이었습니다. 미니 오븐으로 쿠키 굽기란 정말 번거로운 일이었어요. 한 번에 3개밖에 굽지 못할 정도로 작은 오븐 이었거든요. 반나절은 풀가동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의 마음이 예쁘고도 기특해 힘든 줄도 모르고 쿠키를 구워댔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초등 5학년때 모습. 산타 할아버지를 위한 진저브레드맨 쿠키 만들기. 우유와 편지를 곁들인 한상 차림.
하지만 올해만큼은 달랐어요!
12월 1일, 바로 그날엔 창문은 말끔하기만 했어요. 선물 리스트는 크리스마스를 고작 일주일 남기고 창문에 붙어졌고요.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지요.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 또한 식은 걸까요? 짙은 파란색 색종이에 연필로 써 내려간 작디작은 글씨는 제 눈으로도 읽어 내려가기 힘들었거든요.
초등 6학년 산타 선물 리스트. 평소와 다르게 정성을 다해 쓰지 않은게 특징임. 판독이 어려움.
크리스마스를 대처하는 아이의 미적지근한 행동에 확신이 들어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알았어? 산타가 엄마이고 아빠인 거 말이야?”
그동안 산타에 대한 동심을 지켜주고 싶던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아주 대놓고 물었습니다.
요즘은 유치원생도 산타가 없다는 것쯤은 다 아는 세상이잖아요. 사실 초6이 여전히 산타를 믿고 있다는 게 이상하고 놀랍기만 한 일이지요.
아이는 씨-익 웃습니다.
이제는 산타의 실체를 인정하려나 보다 했죠. 그런데 웬걸요.
도리어 엄마는 내가 산타가 없다고 생각하면 좋겠냐며 반문합니다.
아이가 잠든 밤.
선물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선물 할당 배분의 시간이 온 것이지요. 어떤 것이 산타의 선물이 될지, 아빠와 엄마 선물이 될지 말이에요.
선물들도 바로 검색 들어갑니다. 재고 유무, 배송일자, 최저가가 진심 중요하거든요.
다행히 이번엔 해외배송 찬스 없이도 선물 구매가 가능하네요. 작년에는 해외배송과 국내배송 사이 아슬아슬한 배송일을 두고 가격 차이로 어찌나 고민을 했던 지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자세. 아이만 달라진 게 아니었어요.
엄마인 저도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작전명 ‘절대 들키지 마라’로 접근했다면 이젠 좀 느슨하고 허술해진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저도 이제 산타 선물 작전 마지막 해를 맞은 졸업생 입장이거든요. 뭐 한마디로 군기 바짝 신입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죠.
이제는 아주 숨김없이 크리스마스 선물 얘기가 오고 갑니다.
“엄마, 크리스마스 선물 주문했어요?”
“아니. 아직. 어차피 오늘 토요일이라 주문해도 업체에서는 출고 못해. 일요일 저녁때 주문할 거니까 너 마음 바뀌면 일요일까지는 말해줘.”
뭐 이런 식의 대화가요. 이 정도면 산타 할아버지 선물은 안 줘도 되는 거 아닌가요? 참 의미 없는 산타 선물이지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은 하교하며 문 앞의 크리스마스 선물 택배를 아이가 보고 말았어요. 그냥 모르는 척해주면 좋으련만 아이는 신이 나서 택배 상자를 들고 등장하십니다. 여기에 딱 ‘크리스마스 선물. 빠른 배송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다면서요. 에효.
이번엔 들켜버린 선물을 아예 꺼내서 보여주기까지 했어요. 크리스마스 날 뜯는 조건으로 실컷 보여 드린 거죠. 크리스마스를 대하는 자세, 정말 이래도 될까요.
그래도 이번이 산타 선물 받는 마지막 해인 만큼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
이왕 들킨 거 산타 선물과 엄마, 아빠 선물을 완전히 바꿔 보려고요. 보통은 1순위 선물이 산타 선물로 당첨되곤 했거든요.
포장에도 심혈을 기울여 보렵니다.
레고 선물은 아이가 상자를 흔들어서 단번에 알아맞히더라고요. 이번엔 상자에 한 치의 빈틈도 주지 않을 거예요. 꼼꼼 포장으로 흔들어도 예측 불가, 아이의 허를 찔러보겠습니다. 작은 선물은 큰 상자에 넣어보는 포장 센스도 부려 보고요. 과자 선물세트랑 아이가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도 버킷으로 준비. 선물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보렵니다. 이건 가성비 짱입니다. 일단 가짓수가 많으면 좋아하는, 아직은 초딩이니까요.
한 가지 살짝 고민되는 것은 여전히 산타 카드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입니다. 매년 제가 왼손으로 산타를 위장한 채 카드를 썼었거든요. 엄마가 당부하고 싶은 말을 산타를 대신해서 말이죠.
아이도 다 아는 마당에 이것 참 민망한 일입니다. 산타 카드도 원하는지 대놓고 물어보고 싶네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