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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Apr 10. 2020

자살로 죽지 않는 민간요법 3

결론

이렇게 지금까지 죽지 않는 법을 서술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게 좋으니까 죽지 않는 것이지 죽음은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다. 죽음 역시 삶의 한 과정이고 우리의 일부이다. 좋은 삶은 좋은 죽음을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삶을 사랑하는 자는 죽음 역시 사랑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먼저 찾아가지 않고 죽음이 오기를 기다린다. 죽음이란 곳 삶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극과 감각, 그것으로 이뤄진 삶이 결국 거대한 상(象)이라면 몸을 해치고 육체적 본능을 거슬러가며 죽어갈 이유가 무엇이고, 또 죽지 않기 위해 남을 해쳐가며 영생을 바랄 것은 또 무엇일까. 우린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때야 그저 늙어 죽어가는 운명에서 벗어나 비로소 살아가게 된다.

결국 위의 모든 과정은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다. 나를 사랑하는 건 나에 닿는 감각을 사랑하는 것이고, 감각을 구성하는 외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 안에선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사랑할 때 그곳을 벗어날 이유가 없고 곳 자살이란 선택은 금방 잊힌다. 하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 타인 역시 사랑하지 못한다. 결국 그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와 곳 무너질 자아의 바벨탑을 쌓게 되니, 언제나 위태롭고 불안하여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된다.



선천적 인식이라는 녀석은 본능적으로 구별을 낳고 무차별적으로 날뛰며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이로서 우리는 벌래 먹은 풀닢, 화살 맞은 병사처럼 삶을 고통으로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에 감사해야 한다. 그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삶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참함 우울함 두려움과 같은 고통은 맞서 싸울 것이 아니다. 왈츠를 추듯 합을 맞춰나가야 한다. 말이 이렇지만 그저 모든 것을 사랑하자는 범애론은 아니다. 차라리 이미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인정에 가깝다.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얼핏 합리적인 해결책처럼 보이는 고통의 제거, 회피, 도야, 승천은 결국 고통으로서 형성되는 인간의 인격을 살해한다.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사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삶을 부정하게 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삶과 이어지며, 고통을 인정하고 그에 바로 발맞출 때에야 비로소 삶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비로소 죽음 역시도 사랑하게 되면 죽음을 삶의 원천으로 삼게 되고, 곳 죽지 않았으면서도 죽어가는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바로 죽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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