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그다음엔 토마스 홉스가 등장합니다. 잉글랜드의 학자로, 민주적 사회계약론의 창시자예요. 보통 사회계약론 하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떠오르지만 홉스는 왕권을 옹호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을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만민의 만민에 대한 투쟁 상태인 야만 상태에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권리를 왕에게 일임했고, 고로 모든 권리가 모이고 모린 ‘리바이어던’ 같은 정당한 왕권엔 누구든 토를 달면 안 된다는 것이죠. 후에 루소가 계약 이전 야만 상태를 긍정하면서 그 계약의 파기 가능성을 역설하였지만 그 이전엔 왕정주의자 홉승의 사상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왕이었던 찰스 2세는 이 이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하네요. 과거에 왕권은 하늘에서 준 권력이었는데 이젠 땅에 사는 민중들에게 권력을 찾아야 했기 때문일까요.
홉스 다음에 등장하는 철학자는 데카르트입니다. 보통 언제 르네상스가 끝나고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기준은 데카르트 죠. 바로 데카르트식 회의 때문이에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고 하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명석히 생각한 내용은 진리이다.’입니다. 이 명제는 감각과 외부 세계에 대한 극단적 의심을 전제로 깔고 가요. 우리가 감각 기관으로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그 세계의 움직임과 모양에 대한 개연성을 추론하지만 그것을 과연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나란히 놓여 있는 시계가 둘 있다고 해 봐요. 한 시계가 울리자 금방 다른 시계가 울려요. 그럼 사람들은 한 시계가 울렸기 때문에 다른 시계가 울렸다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이 두 시계 간 상관관계는 전혀 없고, 그저 우연에 의한 건데 사람들은 그저 착각에 의해 개연성을 상정해 버렸던 겁니다. 이 세계에서 이와 같은 착각이 없으리란 근거가 없고, 오로지 내가 지금 생각한다는 것 만이 자명하게 돼요. 이에 대해 외부 세계가 다 날 속이는 것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선 데카르트는 ‘신이 악의적으로 날 속일 리 없으므로’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외부 세계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까, 그럼 과연 나의 생각은 얼마만큼 자명한가 가 근대 내내 이어지는 인식론 논쟁의 핵심입니다. 스포일러를 좀 하자면 프로이트가 나타나 무의식을 발견하면서 데카르트 회의주의는 논파당하게 됩니다.
다음에 소개되는 철학자는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예요. 범신론자란,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신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신은 전능하기에 모든 것을 이루고 움직이기에, 모든 것은 정해져 있어요. 만약 내던져진 바위에게 의식이 있다면 스스로 날아가고 있다 생각할 거예요. 우리도 이처럼 신에게 내 던져 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분방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좁게 보기 때문에 에요. 혈관 안에 작은 벌레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벌레는 적혈구와 혈소판, 백혈구가 각각의 방향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사실은 모든 혈관은 같은 방향으로 여느 하나 다름없이 흐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째야 할까요. 머리를 써서 잘 생각하면 정해진 흐름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겠죠. 정해진 그 미래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면서 긍정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묘한 운명론입니다. 인식론보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맹점이 찍혀 있는데요. ‘신은 존제한다’ ‘신은 전능하다’ 같은 대 전제를 바탕으로 소 전제를 이어나가는 논리적인 서술이 특이할 만하죠.
다음은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원자론을 주장했어요. 그리스 시대 원자론자들과 비슷하게 진공을 거부했고요. 단 라이프니츠는 쪼개지지 않는 그 점을 원자가 아닌 단자라고 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엔 특이한 성질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단자와 단자끼리, 수많은 단자들 간 움직임에 있어 어떤 인과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거예요. 즉 서로 부딪히고 출돌하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설계한 듯 흐르듯 움직인다는 거죠. 마치 데카르트의 시계처럼, 서로 이어져서 개연성을 가지는 듯하여도 각 단자들은 어떤 관계도 없어요.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 조화설로 다다릅니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통한 예정 조화설에 신빙성을 더 하기 위해 평행우주를 더해요. 이 세계가 다른 모습으로 움직일 수많은 평행우주가 있지만 지금 우주가 최선이기에 신이 이런 세계를 만들었다고 했죠. 즉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세계에 악이 있지만 가장 최선의 세계이고, 악이 없는 세계는 오히려 뭔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 주장은 현 세계가 좋은 왕이나 권력자들이 좋아했데요.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학문 활동 지속하다 보면 보편 언어라 불릴 만한 보편 수학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보편 수학이 있으면 모든 인문학적 사고를 계산으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해요. 그럼 어떤 논쟁이 벌어질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되겠죠. ‘한번 계산해봅시다.’
그에 대한 라이프니츠 나름의 시도였을까요. 라이프니츠는 주어-술어 논리학을 만들어요. 주어 안에 술어 개념이 모두 포함된 명제를 분석 명제라고 하는데요. 내가(주어) 여행을(술어) 가면 여행은 나를 묘사하는 술어가 되고, 소크라테스는(주어) 죽는다(술어). 에서 죽는다는 술어에 의해 주어인 소크라테스가 묘사되죠. 이런 게 바로 분석 명제예요. 자, 라이프니츠는 이런 분석 명제는 모두 참이라고 했어요. 또, 참인 명제는 전부 분석 명제라고도 하죠. 이걸 이론적으로 이으면, 각 사람(주어)의 계별 개념(술어)이 그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포함하죠. 그렇다면, 각 사람의 개별 개념은 그에게 일어날 일을 전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어-술어 논리학은 예정 조화설 결정론과 만나요. 정리하자면, 주제에 각기 일어나는 일들이 주어의 일부이고, 주어가 가리키는 실체가 존 제한 다면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도록 결정되어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과 주어-술어 논증이 모순된다고 이야기해요. 우선 라이프니츠는 창조를 신의 선의에 의해 존 제한 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보면 이 세계가 존재해야 할 선험적 이유가 없어요. 또 주어-술어 논증은 주어에 해당하는 술어들이 가지치기하듯 영향을 끼친다는 전제를 깔고 가요. 하지만 이는 단자 간 간섭이 없다는 예정 조화설과 모순을 일으키죠. 주어-술어 논증은 이런 면에서 차라리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모순들 때문에 여러 세계가 있다거나 신의 의지에 기대어 설명하는 등 오류 논증이 등장하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