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 행복과 괴로움

당근 거래를 하러 가는 길, 추억에 잠기다

by 피존밀크




오늘은 당근 거래일이다. 팔기로 한 물건을 챙기고 창 밖을 보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눈보라를 바라보니 설렘보단 짜증이 먼저 솟구친다. 하필이면 당근 거래 하는 날 왜 눈이 오고 난리야, 출근할 때 내리는 게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아파트 입구로 내려가니 몇몇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눈썰매에 태우고 소처럼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썰매 위 아이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눈을 맞으며 썰매를 끄는 게 참 피곤할 일일 텐데 저 미소 하나로 부모 또한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거겠지.



눈보라를 헤치며 거래 장소를 향해 빠르게 걷는다. 눈앞을 흐리는 눈을 보니 왕왕초보운전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차 안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처음으로 본 순간, 난 절망에 가까운 기분을 맛봤었다. 직장 단톡방 동료들에게 "오늘 운전 조심하시고 잘 들어가세요. 다들 내일 무사히 만나요."란 메시지를 적은 후, 영화 레버넌트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운행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렇게 싫어할 일인가. 하지만 운전을 시작한 이래로 눈이 더 싫어진 건 확실하다.



눈을 보고 행복을 느낄 순수함이 중년이 된 나에겐 더 이상 없다. 성인이 된 이래로 계속 그랬던 걸까? 눈을 보고 기뻐했던 어른이의 순간들을 잠시 생각해 봤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과 남이섬 여행을 갔었다. 지금은 없어진 경춘선을 타고 남이섬에 도착했는데, 그 넓은 섬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 설경은 나와 내 친구들을 흥분시켰고 우리는 마치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녔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때려 부수며 깔깔 거리기도 했고. 그때 남이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남자 친구를 데리고 한 겨울에 그곳에 방문했었다. 하지만 그날은 애석하게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혹한의 추위에 나뭇잎을 벌거벗은 나무들을 바라보자니 내가 더 추웠다. 남자 친구도 추운데 왜 이곳에 날 데려왔냐고 투덜거렸다. 그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된 이후로도 겨울에 남이섬을 방문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뒤 겪은 눈보라는 나에게 행복보다는 괴로움을 좀 더 많이 줬다. 임용고사 1차 불합격 확인한 직후, 창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기분이 땅끝까지 내려가는 기분을 맛봤던 순간. 아침부터 눈이 내리는 바람에 직장에 무려 1시간 넘게 지각한 날. 옥외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과정에서 빙판 때문에 공중부양을 하는 기분을 맛본 아찔한 순간 등등.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 당근 거래 장소에 도착하니 거래자분이 서 계시다. "당근이세요?"를 여쭤본 후 손에 든 물건을 그분께 드렸다. 5000원을 벌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 눈보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아이들과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부모님들이 여럿 보인다. 똑같은 눈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눈을 바라보는 각자의 감정은 모두 다르다. 그래도 눈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내일 출근길엔 부디 이 눈이 그치길 바랄 뿐이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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