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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Oct 24. 2021

새롭게 탄생한 소중한 추억

부모님과의 책에 대한 추억

나는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책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어린 내 손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책이 자리했다고. 

외할머니도 이모도, 외삼촌도 모두 한 목소리로 너는 늘 책을 봤다고 하셨다. 

이 말의 숨은 무게를 안 건 언제였더라.     

 

아이가 커서 “책이 늘 주변에 있었다”라고 말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책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면 도서관에 가도 책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하기 힘들 테니까. 거기다 육아에 필요한 건 얼마나 많은가. 날마다 달라지는 옷부터 유모차, 장난감 등 준비할 게 넘쳐난다. 그런 물건들의 홍수 속에서 책을 기억한다는 건 어렵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정성스러운 노력 덕분일 것이다. 미처 피부로 느끼진 못했지만. 딱히 엄청나게 여유로웠던 생활은 아니었다. 젊은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셨고 어린 딸은 외할머니와 이모들의 손길로 자랐으니. 위를 보면 부족했을지언정 아래를 보면 넉넉한 나날이었다. 나는 그때를 우리 가족이 가장 어색하고 힘들었던 때라고 추억한다. 어찌 보면 가장 삐걱거리고 불편했을 시기. 그 시절에도 딸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신 노력에 감사하다.      

이럴 때면 우리 부모님인데도 어떻게 하신 건지 신기하다. 나는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 같은데, 그 시절의 엄마 아빠가 지금의 나와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러셨는지. 짐작도 안 가는 정성이었음에도 독서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 어떤 위인전은 꼭 읽어야 한다던가, 읽고 나면 독후감을 써서 검사를 맡으라던가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말을 하기엔 이미 너무 책에 빠져있었던 걸까? 모를 일이지만, 부모님은 쏟는 사랑에 비해 부담은 주시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셨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부모님들을 뵈니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주위의 다른 부모님들을 보면 자식에게 부담을 얹는 경우가 흔했다. 사랑에서 나온 결과이든 아니든. 간혹 그분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희생한 게 얼마나 큰지 자랑하시는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자 자식에게 기대와 희망이라는 짐을 주시는 걸로 보였다. 안타깝게도, 어린아이들에겐 그런 부담은 그저 부담이었다. 뒤에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짙고 거대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단이 날카롭고 힘든데 담긴 의미가 귀하면 뭘 하겠는가.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못되게도 안심하곤 했다. 그런 부담을 내가 느낀 적이 없어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다르고 따뜻해서. 몇 번이나 남몰래 되뇌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우리 엄마 아빠라서 다행이라고. 행운이라고. 이기적인 마음이 지배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만큼,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부모님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니, 어떤 책을 선물 받으면서 생긴 추억도 드물다. 나는 책이 없는 게 어색했고 다른 선물은 책 보다 덜 감동적이었으니, 책 선물은 일상적인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딱 하나. 부모님이 책의 첫 장에 나를 위한 문구를 적어주신 적이 있다.     


“아빠와 엄마는 도윤이의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온 마음을 생각하여 여기에 펜 자국을 남긴다. 2011. 2. 11. 아빠, 엄마가ㅋㅋ”     


중학교 1학년 생일이었다. 고급스러운 초록색 양장에 금박으로 ‘키다리 아저씨’가 박혀 있던 책의 앞장에 저 문구가 담겼다. 아빠가 선물해주신 만년필로 적힌 저 글씨는 유일하게 부모님이 책에 써주신 구절이다. 내 이름의 뜻까지 포함하고 있으면서 나를 응원해주시는 내용이라 그때도 지금도 마음에 쏙 든다. 마지막 ‘ㅋㅋ’까지도 완벽하다. 저걸 쓰시던 부모님의 표정은 유쾌하고 짓궂었다. 장난스러운 부모님의 마음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담겨서 나온 결과물. 딸이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누가 알았을까. 저 문구는 정말로 효력을 발휘했다. 책을 좋아한지는 오래됐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글 관련 공모전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딱 10년이 지나고 저 책에 대해 북레터를 쓴 공모전에서 상을 탄 것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키다리 아저씨>는 내게 인생의 선배 같은 책이다. 특히 대학생활과 관련해서 큰 영향을 주어서 강렬했다. 처음으로 대학에 대한 로망을 심어준 책이고, 내 인생을 좋은 선택으로 이끌어줬으니까. 그런 마음을 담아 써 내려간 것이 참 기쁜 추억을 선물했다. 부모님이 유일하게 글을 써 주신 책이 10년 후에 내가 수상하는 계기가 될 확률은 얼마일까. 심지어 이 사실은 상장이 집에 도착하고, 책을 펴 보고서야 깨달았다. 누군가에겐 그저 흔한 우연일지 몰라도, 우리 가족에겐 하나의 역사가 완성된 날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만나게 되는 모든 순간들은 다 예쁘고 소중하다. 

때론 내게 교훈을 주고 삶을 정비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번 경험을 이길 건 없다. 적어도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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