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없는 아이에 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아주 무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주장을 좋아하고, 의견 피력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열을 띄며 토론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주장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좀 이상할까?
솔직히 정말 모순된 표현이다. 자기의 주장을 좋아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장한다는 건 너무 어렵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말 자주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 자신의 주장이 굳세지 않다고 지적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친구, 선생님, 부모님,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오죽하면 사람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색이 회색이었을까. 회색은 무난한 색이다. 어디에도 제법 어울리지만, 그 자체로 시선을 끌지는 않는다. 좀 칙칙하기도 하고, 좀 흐릿하기도 한 느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도무지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 이야길 받아들인 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능했다. 한창 자신이라는 인격체에 예민한 시기인 사춘기에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꽤 상처가 될 수도 있던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내겐 좋게 다가왔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내 특성 덕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개근상보다도 다독상이 익숙한 학생이라고 하면 얼마나 많이 읽고 좋아했는지 감이 잡힐까? 내가 기억하기도 전에, 나는 읽는 걸 사랑하는 아이였다. 바비 인형이나 로봇, 화장품이나 드레스 대신 책을 더 가지고 놀았다. 자연히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도 독서를 선호했다. 이건 의외의 결과를 불러왔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받아들이기에 익숙해진다. 이 사실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일방적인 소통을 자주 하니까. 책은 스승이자 선배고, 교훈이다. 그 말인즉 아이가 보기에 반박할 수 없다는 소리다. 책은 그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주 현명하고, 오래되고, 뜻깊은 내용을. 그런 관계에, 그런 상황에 빈번하게 노출된다면 아이는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주장보다는 상대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인형 놀이나 화장품 놀이와는 다르다. 그 놀이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야 하는지 등 자신의 주장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책이 악의 근원으로 보일 것만 같다. 나름대로 책을 변호하자면,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한 법이다. 그런 불변의 진리에 맞서 어린 시절 책에 유난히도 빠져있던 탓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일단 독서가 내 일상이 되고 취미란 이름을 가지면서 소통에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게 내가 책을 통해 습득한 소통의 태도이자 방식이었으니까.
그건 독이기도 했고 약이기도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열린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제각기 다채롭기 마련이다. 동화도 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고, 소설도 마찬가지. 어떤 글자든 간에 내가 모르는 건 많았고 일단 들어서 나쁠 게 없었다. 한 책만 판다면 그것이 모든 진리요 법칙이라서 편협한 사고를 지닐 수도 있다. 다행히 좋아하는 책의 경향이 소설, 에세이, 역사, 시, 예술 등 다양한 빛을 띠어서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피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은 차고 넘쳤기에 열린 태도를 넘어 수용하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어떤 일이든 상식적인 선 이내의 일이라면 괜찮았고,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한 가지 틀에만 박히지 않은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크게 거부하지 않고 윤리에 어긋난 게 아니라면 상대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신에 자기 생각을 다듬는 게 어려워졌다. 책은 쉽게 쓰이는 게 아니다. 각자의 생각이 뚜렷하고, 자신의 글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쓴다. 많은 경험과 의견과 지식이 담겨있다. 그런 지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걸 어릴 적부터 접했으니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겠는가. 내 생각은 다채롭지도, 놀랍지도, 혁신적이지도 않았다. 내가 떠올린 건 반드시 존재했고, 그 이상을 나아간 일이 흔했다. 그러니 자신감을 잃는 건 아주 조용히, 서서히 진행됐다. 책은 세상을 보여줬지만, 그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조금 뼈아픈 경험이었다. 자신감은 의욕과도 같아서 한쪽이 떨어지면 다른 쪽도 떨어진다. 의욕이 바닥을 친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장을 표출하는 데 의욕을 내뿜을 일이 적어진 것이다. 의욕도 없고, 자신감도 별로,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갈등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면 더더욱! 책에서 그런 드높은 경지로 인한 자신감 하락과 함께 깨달은 게 있다면, 모든 일은 갈등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사는데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사회 구조 때문에, 서로의 감정 때문에, 혹은 욕망 때문에 갈등은 빈번하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은 게 갈등이었다.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은 없애고 싶었다. 그러니 얼마나 타인의 의견을 환영했는지 짐작이 가는가. 주장에 필요한 자신감이나 의욕은 덜하고, 갈등은 피하고 싶고. 자신의 주장을 탄탄하게 이야기하는 데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번 자신의 주장을 하게 되면 그 맛을 보게 된다. 이제는 주장을 잘 못 한다는 소리는 못 듣는다. 많이 성장했지만, 예전의 주장이 약하다며 너무 우유부단하단 소린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아무래도 좋게 들리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 모습이 내 모습이란 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어릴 적에 조용하다, 책을 많이 읽는다 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전철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책은 다른 세상의 요소처럼 양면의 날을 지니고 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모두. 모든 일의 원인은 복합적이기 마련이다. 책과 관련된 경험으로 힘들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좁아졌을 수도 있지만 그게 온전히 책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분명 책은 우리에게 좋은 점도 함께 선물해주었다. 나와 같은 게 아니라도, 같은 방식이 아니라도 배운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책의 진정한 의도이자 목적 아닌가.
나는 주장을 하는 데 정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주장을 좋아하는 건 책 속 인물들과 똑같았다. 유독 달랐던 건 내가 소통을 배운 방식, 상황과 환경이었을 뿐. 그렇기에 한동안 주장에 서툴면서도 의견이 뚜렷한 애매한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멈춰 있다면 내가 이토록 개운하게 풀어놓기는 불가능했을 터. 이미 그때에서 벗어나 성장했으니 그 시절은 그 시절 나름의 의미가 있다. 받침 없는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물론 자신의 주장을 화려하게 뽐내는 사람이 된 건 아니다. 그건 일단 타고난 성향에서 다른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회색의 사람일 거다. 은은하고, 어쩔 땐 좀 수수하고, 제법 여러 상황에 잘 녹아드는 사람. 단번에 눈을 잡아끌지는 못하겠지만 어디선가는 보일 사람.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
이제는 칙칙하기만 한 회색이 아니라 보일 땐 보이고 묻어갈 땐 묻어나는 회색이니까.
화려한 무지개색이 내 옆에 있어도 뭐 어떤가.
다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다. 내 성장을 내가 아는 한 주변의 아름다움에 슬퍼할 일은 없을 거다.
충분히 그 가치를 알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