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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케이 Oct 05. 2022

02. "이별"의 과거형: 사랑

설레고 싶은 마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랑이다.  

기분 좋은 해프닝으로 웃어 넘기기에 그 짧은 만남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험지를 손에 든 나는 평정심은 이미 잃고 있었다. 빼곡히 쓰인 주관적인 답변속에 정답을 포장하려 하는 위장술을 파악하기에는 냉철함은 커녕 가슴이 너무 뜨겁다. 좀 식 힐 필요가 있었다. 커피를 손에 들고 멍하니.. 하얀 얼굴의 그 청년이 자꾸 어른 거렸다. 그런데, 눈물이 나질 않았다. 어제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한데, 가슴은 자꾸 콩닥콩닥 나댄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우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가 그냥 지나다 한번 가볍게 던진 말이라 생각하실까 해서요. 잠깐 뒤를 돌아본 모자 아래 볼만 보고 무조건 쫓아가야겠다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오늘 제가 가장 잘한 일 같습니다.



콩닥거리던 가슴이 내려앉아 버렸다.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학사정보를 확인했다. 학번이 왜 이래?

아.. 역시.. 앳되다 싶더니, 나보다 5살이나 어리구나.. 참.. 웃프다.. 지금 복학하면 내 수업을 들을 수도 있겠구나. 마음은 벌써 저만치 구름 위를 떠있고, 머리는 말한다. '아니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제 복학하면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언제 졸업해서 취직하고.. 멀다 너무.. 난 학위 받으면 유학 갈 텐데..'



나이가 들었다는 말은 현재보다 미래를 먼저 생각한다. 심지어 감정도 컨트롤이 가능하다. 힘들 것 같은 뻔한 길은 굳이 알면서 가지 않는다. 감정 같은 건 쉽게 접어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고도 생각은 했지만, 셀레였다. 어제의  서럽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나는 또 다른 사랑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내 마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설렐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사랑의 시작은 설렘으로 꽉 찬 파스타 위에 살짝 뿌려진 파슬리 정도의 두려움이 있지만 파스타만 보이는 하나의 배고픈 감정으로도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또 사랑에 빠진다. 이별 뒤에 그렇게 죽을 것 같던 내가 또 다른 나로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별 기억의 절제가 가능한 유일한 감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시키고 이해시켜가며 설렘으로 사랑에 한 발짝 다가갔다.



누군가에 들킬 것 같은 마음이 한편에 있었지만, 이 시작이 어떤 결말이 예견되어 있던 지금은 이 감정에 기대어 살고 싶었다. 이미 우리는 연인이 아니어도 선후배 일 수 있으니까..  마음 정리가 덜 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건물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나대는 심장을 절제할 방법이 없었다.



-선배, 이제 가시는 길인가요?

고개를 들고 말하라..제발 난 너무 티가 나는 나를 속일 수 없었다. 

-네, 아니고.. 어 그래.. 넌 여기서 뭐하니?

얼굴이 너무 뜨겁다.. 느껴진다. 느끼니까 더 빨개진다. 다른 생각.. 빨리 다른 생각..

-아, 저요? 선배 기다렸죠.. 밤샐 생각 하면서.. 생각보다 빨리 나오셔서.. 그럼 우리 가요

뭐가 이렇게 얘는 솔직하고 당당하지.. 난 뭐가 이렇게 부끄럽고 설레고 수줍지..

이성적이고 싶다. 너보다는 조금 앞선 세상을 살고 있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어딜 가는데? 왜? 우리? 어..

-집에 가시는 길 아니세요? 아니어도 그냥 가시는 길에 옆에서 있기만 할게요. 방해하지 않고..

이런 멋있기까지 하다.. 아.. 이 청년 뭐지.. 자세히 보니 잘 생긴 것 같기도 하다. 하얀 구름 같다.



모자 덕분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눈을 마주 치치 않아도 덜 어색해서 다행이었지만,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와 눈도 마주치고 제법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다. 그냥 지금이 좋다. 지금은 아프지 않으니까, 어제와 다른 마음이어서 좋다.



그는 다음 날부터 연구실 옆 계단에 목캔디를 올려놓고 문자를 남겼다. 마치는 시간에는 늘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과외가 있는 날에는 2번에 1번꼴로 막차를 놓쳤다. 하루는 그가 아버지 봉고차를 몰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타요. 좀.. 지저분하죠.. 아버지 가게에서 쓰시는 차를 빌려오느라..

여기저기 수족관에서 볼법한 물건도 널브러져 있었다. 옅고 깊은 코끝에 닿는 비린내가 있었다.

- 저녁 안 먹었죠? 여기 이 도시락 받아요. 저는 운전해야 하니까 먹어요. 천천히 달릴게요.



도시락을 받아 열었다. 초밥이었다. 광어 초밥.. 다소 투박하고 락교나 고추냉이도 없는 일식집과는 거리가 먼.. 방금 막 급하게 만든 도시락이었다.

-아, 부모님이 횟집 하세요. 파는 건 아니고 제가 가끔 가게에서 먹는 초밥이에요.

-어? 그래.. 밤 11시 30분에 초밥이 가능한 곳이 어디 있나 잠시 생각했어. 고마워.



지금 집에 가도 아무도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조용히 세수 정도 하고 내방으로 가서 아무도 깨지 않게 침대에 들어가 삼각김밥 정도 먹을 참이었다. 눈물이 났다.. 도대체 뭘까 이 사람은..

-왜요? 매워요? 고추냉이가 많구나.. 괜찮아요?

고추냉이가 매운 걸로 하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먹어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초밥이었다.



우린 이렇게 일상을 공유하고 가끔 주말도 함께 했다. 나보다 어려서 인지, 후배라는 카테고리 때문인지 그가 하려는 손잡기 같은 애정행각에도 내 얼굴은 토마토가 되었다. 어쩌다 갑자기 스무 살 새내기가 되어버린 것인지..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꽤 오래 시간 나에게는 편안하고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씩 하는 질문은 불편했다.

'내가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라던가, '유학은 꼭 가야 해요?' 같은 이미 둘 다 합의된 이야기를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그가 조금씩 불편하기 시작했다. 유학 갈 날짜가 다가오면서.. 더욱더..나는 답을 하는 대신

'의전원 편입한다더니 공부는 하고 있어? 라던가, '학부 성적도 중요한데 기말고사 공부는'과 같은 전형적인 엄마의 잔소리로 응대했다.



우리의 시작은 순수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남자 친구로 밝힐 수 없다고 했고, 유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당당했다. 나의 강의를 듣는 그를 남자 친구로 밝힐 수 없었고, 유학은 너를 만나기도 훨씬 전부터 있던 내 인생이어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종종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 시 전 이야기를 그에게 했었다. 원래는 나는 의대를 편입하려고 했는데.. 말꼬리를 흐리면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자기가 의대를 가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렸는데, 진지하게 준비하고 학교 앞에서 자취까지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어차피 나의 유학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긴 시간 각자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셀레일 줄 알고  괜찮다는 착각으로 지금까지 사랑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아무런 확신도 미래에 대한 약속도 흐릿하게 둔 채 예정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벌써 그리웠다. 예약석이 취소되어 어렵게 잡은 비행기라 그런지 나만 빼고 뺑둘러 다 일행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혼자였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다시 돌아갈 안정된 곳도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그를 떠나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 없는 미래에 놓인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자신감만 있던 그는 말없이 다 해낼 거라 표정만 지었다. 떠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을 그는 보지 못했다. 난 남자친구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연구실 식구들이 새벽같이 공항에 나와서 배웅했다. 그에게는 나를 배웅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게 사랑인가? 정말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를 정말  사랑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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