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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케이 Oct 05. 2022

03."이별"의 현재형: 추억

멀어지면 이별이 쉬워진다는 어리석음이 상처가 되다.  

늦은 오후 4시.. 우리 비행기 승객들만 컨베이어 벨트 앞에 몰려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이렇게 휑한 공항은 처음이었다. 같은 연구실의, 그러나 얼굴은 아직 본 적 없는 박사님의 와이프가 4살 배기 딸아이와 함께 공항에 나와 계셨다. 알고는 있었지만 무척이나 바쁜 연구실인가 보다. 



따뜻한 미소로 한껏 반겨 주셨다. 나도 같이 웃었다. 박사님 집에 며칠 묵기로 했다. 집을 구하기 전까지 같이 지내자고 먼저 제안해 주셨다. 다른 여자 연구원도 있었는데,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내가 불편했던 것 같다.  푸른 녹음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길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특유의 공항 냄새가 이방인의 온몸을 둘러쌌다.



-피곤하죠? 생각보다 멀더라고요.. 우리 집도 연구소에서 좀 멀어요.. 여기 택시비도 비싸고.. 한국보다 물가가 더 비싼 거 같더라고요.. 집은 좀 알아봤어요? 박사님? 박사님?

- 네? 네? 피곤하네요.. 아하.. 집은 몇 군데 알아봐서 내일 직접 가보려고요..

시내를 한참 달려 다시 공항과 비슷한 시골 같은 길을 지나 또 한참을 달려 도착했다. 방 하나를 내어 주셨다.

시원한 물 한잔 받아 들고 앉았다.   



-박사님..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아니.. 내 남동생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네, 있어요.. 남자 친구.. 5살 어린 연하예요. 우리 2년 정도 사귀었고요..

그랬나 보다. 있다고 꼭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여기 없다. 있다고 했지만 그는 여기 없다.



별다른 이야기로 이어가지 못하고 교수님과 간단히 통화를 했고,  괜찮으면 지금 연구실로 나오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짐도 못 풀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도착한 연구소는 생각한 것보다 아주 멋있었다. 로비에는 노란 머리 교수님이 있었다. 늦은 점심시간이라 간단히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한참 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별로 기억에 나지는 않았다. 딱 하나' 혹시 한국에 뭐 두고 온 거 있나요?'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보며 물었던 것 같다. 자세를 고쳐 앉고 내 연구 이야기로 이어나가며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첫인상이 이렇게 인식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짧은 영어지만 열심히 준비한 대로 나름 잘 마무리했다.



정신없이 타지 생활을 어어나갔다. 의식주부터 적응을 해나가야 하는 생활은 몸집만 큰 갓난아기 같았다. 아는 것도 익숙한 것도 그리고 엄마도 내겐 없었다. 처절하게 눈치로 모든 것을 익혀 나갔다. 늦은 퇴근 시간 익숙한 듯 그와의 짧은 대화는 그리움을 사랑으로 덮기에는 서로 지쳐 있었다. 어쩌면 나만 지쳤었는지 모른다. 전혀 알 수 없는 각자의 생활은 간단하고 무료하게 전달되기 일쑤이고, 마음만 애틋했다. 마지막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라는 내뱉지 못한 말만 남기고 짧은 한숨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내 인생의 일부가 막혀있는 것 같은 답답함과 가볍게 살고 싶은 나의 인생 계획에는 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학 이후 다른 모습을 그려 보려 해도 그가 먼저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내 인생에 그의 인생까지 미지수로 두자니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했다.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감정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결이 다른 생각에도 그가 있었다.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분명 나쁜 신호였다. 나는 계속 그의 탓을 하고 그를 걷어내고 있었다.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이런 감정을 그에게 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을 핑계로 그와의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고 익숙해지면 이별이 좀 더 쉬울 거라 생각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이기적이고 아주 비겁한 방식이었다. 그를 배려하지 않은 아주 치졸하고 솔직하지 못한.. 상대가 나를 떠나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유 없는 이별을 나 혼자 하고 있었다.



- 이유가 뭐야? 그것만 말해요.. 사실대로만 말해요.. 붙잡지 않을게요..

이유가 없어서.. 한 단어로 표현이 안돼서 그냥 이렇게 하면 네가 멀어질 것 같아서 그랬다고.. 아니 그냥 그렇게 나를 잊어줬으면 해서.. 그렇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꽤 오래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서로 놓아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잠시 갖고 싶었던 침묵도 없이 그는 바로 받아 이어 나갔다.

-다른 사람 생겼어요? 그러면 그만할게요. 누군지 알려줘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이게 뭐야! 나 아직 아무것도 해준 것도 보여준 것도 없는데.. 나 아직 당신 사랑하는 거 시작도 못했는데 왜! 왜!

그는 화가 났다. 나도 화가 났다. 왜 이런 이유를 꺼내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상대가 누군지 알려줘야 헤어지는 건가? 뭐가 이래?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미안함과 아련함을 가슴에 두고 담담히 헤어지고 싶었다. 나는 그가 그럴줄만 알았다. 내가 아는 그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하자면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그의 여리하던 모습이 나약하게 그려졌고, 수줍던 미소는 소심하게 떠올랐다. 어딘가 든든함이 없던 모습, 내 인생 전부를 놓고 기댈 수 있을지 항상 의문을 갖게 했던 그의 모습.. 어쩌면 눌러져 있던 이 마음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 아니야.. 나, 한국 안 돌아 갈지도 모르고.. 마음의 빚처럼 너를 안고 사는 게 힘들어..

-지금 힘들어서 그래요. 괜찮아요 일단 내가 갈게요. 비행기부터 알아봐야겠네.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그의 이렇게 흥분하고 다급한 목소리는 처음이다. 도망가고 싶어졌다. 지금 나를 잠시만 이대로 놓아줬으면 했는데.. 이 마음 나도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나를 몰아가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 우리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야기 하지 못했다. 다시는..



그렇게 피했다. 마지막을 독설로 퍼붓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지금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랬다. 그렇게 새벽 내내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어리석은 나의 이별 방식이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는 많이 아팠던 것 같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시작점을 찾아 나설 만큼 머리가 맑았다. 어설픈 사랑의 시작이 후회로까지 남고 싶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없어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별은 그 이유가 헤어지게 한다.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이유가 꼭 있다.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이별은 마무리라는 것이 없다. 어쩌면 잊었다 착각하며 평생을 사는 건지도 모른다.



나만 없는 그곳에서 추억과 이별을 동시에 맞이해야 하는 그를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 아침에 나를 그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나를 길고 긴 시간 동안 비워내야 하는 그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늘 얇은 외투를 입고 빨갛게 얼은 손을 내게 내밀며 같이 걷던.. 차비가 없었지만, 시간이 많았던 우리의 지난 시간이 추억으로 넘어간다. 이해관계가 얽혀서 연인관계를 뒤로 한 채 몰래 나누던 우리의 사랑이 이제 추억으로 넘어간다. 좀 더 당당하게 자존감을 실어주고 싶은 내 마음을 읽고 보여주겠다며 새 삶을 준비하던 너의 희망이 이제 추억으로 넘어간다.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모른다. 나는 그가 얼마나 아픈지 잘 모른다. 내가 아는 만큼 사랑했고, 아플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의 인생의 교차점에서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고 사랑했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 했으며, 그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원했다. 


추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몸이, 마음이, 감정이 기억한다. 옅어질 뿐 가늘고 길게 이어진다. 추억은 나와 함께 나이 먹는다. 그래서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추억은 이별의 현재형이다. 왜곡되기도 하고 일부 지워지기도 하지만 추억의 시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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