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하는 마음
요즘 뭐하고 지내냐는 지인의 물음에, 글을 쓰면서 지내고 있다고 했더니 <월간 채널 예스>에서 공모전이 있다며 한번 지원해보라고 링크를 보내줬다. 주제를 보니 “나만의 인간관계 노하우”였다. 언젠가 ‘관계’에 대해서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지라, 무작정 노트북을 열고 나만의 인간관계 노하우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A4용지 기준으로 한쪽을 쓰다 말고, 그대로 노트북을 덮고 책상에 엎드렸다. 열심히 적어 내려갔지만, 나만의 노하우 따위는 없었다. 여전히 관계는 어렵고 힘들어서 푸념만 늘어놓다가 힘이 빠져서 더 적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글은 완성하지 못했고 공모전에도 지원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두루두루 반 친구들을 사귀며 둥글고 완만하게 친구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물론 그때도 친구 관계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내가 속한 무리에서 소속감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을 느꼈다. 특히 여학생들은 무리 지어 다니는 특성이 있다 보니 나 또한 내가 속한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둥글게 관계를 맺으려는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잔뜩 눌리고 소심해졌다. 적응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먼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수능을 쳤을 당시에, 예상했던 점수보다 시험을 못 봤다. 그때 느낀 절망감은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엄청난 패배감이었다.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꼈다. 내가 쏟은 노력에 비해 결과가 초라해 보여서 큰 좌절을 느꼈다. 재수하기는 두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들어갔다.
초중고를 다닐 때처럼 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없는 생판 낯선 환경과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다. 학교생활에 만족이 1도 없었다. 숫자로 표현하면, 0도 아니고 마이너스였다. 고심해서 고른 전공 사회복지도 너무 지루하고 따분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포장하고 감췄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고 방황했던 시기였다. 사실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많이 미워했다.
내 혈액형은 O형인데 대학생이 되면서 A형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초면에 몇 마디 하다가 나보고 트리플 A형 같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무례한 말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A형이라고 하면 으레 소심하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나를 얼마나 봤다고 저렇게 말하는지. 소심하다는 말이 너무 싫었다. 사람들에게 내성적으로 보이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와 달리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들을 보면 부러웠다. 그들이 마당발처럼 넓게 관계를 맺는 걸 보면서 또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는데, 나는 맨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결국, 관계가 힘들었던 이유는 그 관계 속에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나라는 사람을 뜯어고치고 싶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내가 ‘나’를 싫어했다.
사실 내가 ‘나’를 싫어하면 누구보다 힘들어지는 사람은 나였다. 그걸 알면서도 누군가와 비교하며 나를 깎아내리고 자괴감으로 빠지는 생각을 끊어내는 게 힘들었다. 내가 가진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 보였고 실제로도 단점이 많아서, 그런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쉬웠다.
‘주님,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요?’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 한탄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마다 내 마음에 ‘너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부어주셨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었다. 흙탕물이 가득 찬 컵에도 생수를 계속 부으면 맑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조금씩 인정하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나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감정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솔직하게 답하겠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나를 미워했던 감정을 조금 덜어내고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는 단계에 있다. ‘너는 왜 이래, 왜 그것밖에 못 하니’ 하며 있는 힘껏 나를 질책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덤덤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 눈에 내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힘들다고 할지라도.
조금 못나고 부족해도 그게 내 모습이다. 소심하고 뒤끝 있지만 그게 나다. 그런 나를 싫다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나를 인정하기만 했는데도 자괴감에 빠져드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남들과 비교하는 생각도 오래 하지 않도록 끊어내는 힘이 생겼다. 나의 예민한 특성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깊이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끔 뿌듯한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을 칭찬해주기도 한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나를 인정하는 것이 1단계다. 나를 인정하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면 셀프 칭찬도 가능해지고 다른 사람의 인정과 관심도 비딱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함께 갈 수 있다.
여전히 관계는 어렵고 힘들지만, 내가 나를 인정하면서 조금은 성장했다는 걸 발견했다. 나를 아끼며 내 주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부족하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도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며, 부단히 나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언젠가 나만의 관계 노하우를 전해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