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히피펌으로
나는 미용실에 잘 가지 않았다. 영화 <집으로>에 나온 장면처럼, 어릴 때는 친할머니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셨다. 그것도 바가지로. 빙구 같은 내 머리가 속상해서 대성통곡하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계속 단발을 유지했다. 일명 버섯머리.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단발이었고 파마와 염색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고분고분한 학생이었기에 단정한 복장으로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머리 길이가 어느 정도 허용이 됐는데, 관리하기 편해서 단발을 유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수능이 끝나고 힘들었던 한편, 수험생의 해방을 맞으며 오렌지빛이 도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했다. 그것도 미용실에 가지 않고 집에서 셀프로 염색했다. 변화된 나를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건 아마 외모에 변화를 주는 것일 테니,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염색을 하며 자유를 느꼈다.
처음 파마를 했던 건 스무 살 여름 때였다. 염색은 집에서 할 수 있지만 파마는 집에서 하기 힘들어서 큰 맘먹고 미용실에 가서 돈을 내고 일반 펌을 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파마가 2주 만에 풀려버렸다. 돈이 아깝고 속상했지만 컴플레인을 걸기엔 내가 너무 소심했다. 남은 건 개털이 되어버린 머리였다. 집에서 셀프 염색을 하고 바로 미용실에 가서 영양제 없이 파마를 하니 안 그래도 힘없고 가느다란 모발이 푸석푸석해졌다. 모발도 휴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땐 지식이 없었다.
나는 개털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회복하기 위해 머리를 감을 때 트리트먼트를 빼먹지 않았다. 머리를 기르고 상한 부분을 잘라내는 걸 반복하면서 머리카락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 후로 계속 긴 머리를 유지했다. 단발은 지겹도록 했기 때문에 되도록 오랫동안 긴 머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중간중간 집에서 셀프 염색은 했지만, 파마는 금방 풀리는 게 겁이 나서 하지 않았다. 짠순이여서 머리에 돈을 쓰는 것이 아깝기도 했고.
그런데 작년에 취업하면서 다시 파마를 하고 싶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고심 끝에 동네 다른 미용실에 가서 S컬 열펌(굵은 펌)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스무 살 때 했던 일반 펌보다 좀 더 비싼 파마이기도 했다. 파마는 꽤 오랫동안 탱글탱글한 컬을 유지했다. 시간이 가면서 풀리긴 했어도 머리가 10개월 정도 지났는데도 파마가 남았으니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올해 여름이 되어 다시 새로운 머리를 하고 싶었다. 딱히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긴 머리가 축 늘어져서 리프레쉬를 하고 싶었다.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은 머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히피펌이었다. 히피펌은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늘 실패하지 않는 선에서만 시도했기 때문에 파격적인 변신을 하고 싶었다. 원래의 계획은 상한 머리를 잘라내고 한참을 기른 후에 건강한 모발의 상태에서 히피펌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원하는 히피펌을 하려면 단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했다. 단발이 지긋지긋해서 6년 동안 긴 머리를 유지했는데 머리를 자르고 망할까 봐 심각하게 고민했다. 머리 자라는 속도가 워낙 느리기도 하고 막상 돈을 들여서 머리를 했는데 빠글빠글한 스타일이 나랑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도 했다.(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문득, 머리가 자라는 속도가 느리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랄 것 아닌가. 맘에 들지 않으면 묶고 다니지 뭐. 라는 생각으로 간단하게 고민을 끝냈다.
드디어 대망의 날이었다. 6년 만에 단발로 자르는 순간이었다. 늘 새로운 변화를 꿈꾸면서도, 관성의 법칙처럼 안정적인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고수했던 긴 머리가 잘려나가는 것을 볼 때, 열심히 기른 머리가 아깝다는 생각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떨리면서도 신선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 후에 이어지는 파마는 약 3시간의 인내가 필요했다. 다행히 친구와 같이 머리를 하러 갔기에 수다 떨면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하러 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폭탄 머리가 나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신선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었다.
3시간이 지나고, 처음 시도하는 히피펌은 어떻게 나올지 너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두구두구. 6년 만에 다시 짧아진 단발과 함께 시도했던 히피펌은 다행히도 성공적이었다. 변화된 내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나름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생기발랄해 보였고 개구쟁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아빠는 왜 갑자기 아줌마가 됐냐며 놀리듯이 얘기하셨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서 크게 상관없었다.
오랫동안 하고 싶어 하면서도 주저했던 작은 시도를 통해 왠지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기분 전환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내가 변화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 좋은 착각은 잠시 해도 되지 않을까. 주저해왔던 것들을 미루고 미루다가 끝끝내 하지 못해서 후회하고 아쉬워하기보다는, 좀 더 용기를 내서 작은 시도를 해보는 게 어떨까. 그것이 비록 해리포터의 해그리드가 될지언정, 시도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 앞으로도 나는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다. 남들이 보기에 예쁘지 않아도 내가 마음에 들면 괜찮다. 그렇게 갈수록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