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 깜빡이던 형광등이 결국 나가버렸다. 형광등의 수명 문제라면, 새로운 형광등으로 교체하면 되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몇 주 전부터 불을 켜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꾸 꺼져서 집에 있는 기다란 막대기로 툭툭 건드리면서 켰는데, 이젠 막대기로 건드려도 미동도 없이 켜지지 않았다. 혹시나 형광등 문제인가 싶어서 나보다 키가 큰 남동생한테 부탁해서 새 걸로 교체해보기도 했는데 불은 켜지지 않았다. 전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집이 낡고 오래된 탓에 종종 이런 문제가 생긴다. 불편했지만 어차피 저녁이기도 했고 거실에 있다가 잘 때만 내 방에 와서 잠이 들었다.
그동안 내 방에 형광등이 자주 나갈 때, 나도 엄마도 아빠한테 고쳐주시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었다. 평소 아빠는 못질부터 시작해서 세면대 샤워기 교체, 신발장 제작 등 집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직접 보수하고 관리해오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빠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전기 기사를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 형광등을 새로 교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빠의 입장도 이해하긴 했지만, 아빠가 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처리되지 못한 내 감정은 나도 모르게 쌓여있었고, 몇 주 전부터 방에 불이 자주 나가는 불편함과 짜증이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내 방 형광등이 완전히 사망해버린 다음 날 아침, 나는 거실에 나가서 오늘의 할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주식을 시작한 아빠가 부모님 결혼 기념 30주년을 위해 삼 남매가 모아둔 작은 돈도 주식에 투자해야겠다고 하셨다.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 주식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는 맨 땅에 헤딩하듯이, 주식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까지 마음이 불안했다. 저렇게 섣불리 시작했다가 얼마 없는 돈이 날아갈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별 수 있나. 부모님을 위해 모은 돈이니까,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몫은 부모님께 맡겨야 했다. 아빠는 공부했다고 하면서 안전한 곳에 주식을 투자할 거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했다. 부모님이 은행에 가셨을 때, 친오빠한테 전화해서 내가 걱정되는 상황을 얘기했다. 둘째 딸이 하는 말은 안 들어도 맏아들이 하는 얘기는 들으실까 싶었다. 오빠는 알겠다고, 자기가 아빠한테 전화해보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빠는 네가 오빠한테 전화했냐고, 그렇게 아빠가 걱정되냐고 물으셨다. 고자질 아닌 고자질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 돈이 나 혼자 모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빠한테도 상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나한테 진짜 문제는 아빠의 주식이 아니라 내 방에 불이 나간 게 문제였다. 그래서 주식만 신경 쓰지 마시고 딸 방에 불이 나간 것 좀 고쳐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건 네가 전파상 찾아가서 고치면 될 문제인데 왜 아빠를 의존하냐고 하셨다.
억울했다. 아빠가 주식에 투자하려고 급하게 돈을 찾으시니까 내가 오전에 계획한 일정은 다 미뤄놓고 잘 안 쓰는 통장에 모아둔 돈을 찾으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데(휴면 계좌가 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정작 내가 구하는 도움은 나 몰라라 하시는 아빠가 야속했다. 저는 아빠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드렸는데 아빠는 왜 안 도와주시냐고 묻자, 아빠는 네가 알아서 하면 될 문제라면서 매정하게 말씀하셨다.
계속하면 말싸움이 커지겠다 싶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오후에는 약속이 있어서 준비하려고 머리를 감는데, 아빠는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 생각하다가 내가 먼저 짜증 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만약 내가 “아빠, 제 방에 불이 완전히 나갔는데 아빠가 알고 있는 전파상에 연락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부드럽게 부탁했다면 아빠도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주식만 신경 쓰지 말고 딸 방 좀 신경 써달라고 톡 쏘듯이 얘기하니까 아빠도 기분이 상하신 것 같다. 내가 오빠한테 고자질을 한 것 같은 상황도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빠를 신뢰하지 못해서 얘기했을 테니 이미 기분이 안 좋으셨겠지. 게다가 나는 잊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 전에도 주식에 투자하려고 하니까 돈을 미리 보내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나는 내 기준에서 별로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미뤄놓다가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방에 전기가 나간 것만 신경 쓸 뿐, 아빠의 도움 요청은 내 일처럼 챙기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빠가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전파상을 알아보면 될 문제인데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의존적인 데다가 아빠의 호의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이 모든 발견은 머리를 감으면서 생각의 관점을 아주 살짝 바꾸니, 새롭게 보인 것들이었다.‘아빠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라고 내 감정에만 빠져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부분인데, ‘아빠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지 않을까’하고 조금이나마 아빠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분노로 끓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아빠가 먼저 미안하다고 얘기를 꺼내셨다. 급하게 주식을 투자하는 모습에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주식보다 아빠가 매정하게 말씀하신 게 상처였다고 하면서, 저 또한 퉁명스럽게 말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아빠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했다며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그 정도로만 얘기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어떻게 내가 아빠를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빠도 나를 다 이해할 수 없듯이.
맞다. 그래서 방은 어떻게 됐냐고? 내가 약속이 있어서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엄마가 전파상에 가서 말씀을 드렸고 기사님이 와서 고쳐주셨다. 다행히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사실 다 큰 성인이니까 내 방은 당연히 내가 신경 써야 맞지만, 여전히 부모님께 의존하고 싶은 철부지 딸이다. 뭐.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어둡고 깜깜한 내 방에 밝고 환한 빛을 되찾았으니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