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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Aug 08. 2024

40년만에 떠난 아빠와의 첫 여행

나는 종종 국내 출장을 갈 때가 있다. 부모님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외근이나 출장이 있을 때면 아빠에게 "저 내일은 어디에 가서 못 와요"라고 말하곤 한다. 얼마 전엔 통영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빠가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동행을 제안하셨다. 아빠가 이런 제안을 하신 건 처음이라 무척 의아했다.


얘길 들어보니 오랫동안 못 만난 술친구가 통영으로 내려가 살고 있어서, 한번 만나고 싶으셨던 거였다.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 적이 40년 넘도록 없다보니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빠에게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 같이 가기로 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아빠와의 첫 여행이 시작됐다. 1박 2일의 짧은 출장이었고,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한 군데 정도는 들러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름대로 동선을 계획했다.


아빠는 평소와 다르게 하고 싶으신 게 명확했다. 친구를 만나 오랜만에 술을 한잔 하고, 배를 타고 바다를 한번 나가봤으면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친구분과 함께 있도록 모셔다 드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근거리에 있는 한산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첫날엔 도착하자마자 친구분과 물만난 고기처럼 술을 드시고 기분 좋게 주무셨다. 이튿날 아침에는 계획에 없던 사우나를 하게 됐다. 몸이 불편해 오랫동안 사우나에 가보지 못했던 아빠는 오랜만에 온탕에 푹 들어갔다 나오실 수 있었다.


아빤 근래 몇 번의 사고와 자살 시도 후 급격하게 쇠약해지셨는데, 목욕탕에서 그걸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탕에 들어가고 나갈 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조심조심 움직이는 모습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도 불안했는지, 염려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렇게 먼 곳에 와서, 바다가 보이는 목욕탕에서 샤워를 한 건 아빠도 나도 처음이지만, 아빠에겐 마지막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 내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한산도행 배를 타러 갔다. 일정이 좀 빠듯하긴 했지만, 아빠가 유일하게 해 보고 싶었던 바다 구경을 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한산도까지 30분 안팎 배를 타는 동안, 아빠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봤다. 서로 할 말도 별로 없었지만 하늘이 맑고 경치가 좋아 그걸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봉투에 남아 있던 빵조각을 떼어 갈매기에게 던져주고, 그걸 받아먹는 갈매기를 보며 한산도에 다다랐다. 잠깐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지휘하던 장소였던 제승당에 들러 어색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와 다시 배를 타고 통영으로 돌아왔다.


내가 일하는 동안 아빠는 어제 만난 친구를 만나 또 술을 거나하게 드셨고, 일을 마친 나는 아빠를 모시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그렇게 40년만에 처음 떠난 부자의 여행이 마무리됐다.


얼떨결에 떠난 여행이었지만, 아무 기대 없이 가서 그랬는지 전반적으로 좋은 인상으로 남은 여행이었다. 어린시절, 아빠와의 여행은 물론 가족끼리도 여행을 떠나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이번 여행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아빠 역시 10여년 만에 친구를 만나고, 배를 타고 바다를 보며 기분전환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비록 엄마 아빠 두 분과 함께 여행을 하진 못하더라도, 언젠가 엄마를 모시고도 한번 짧게, 기대 없이, 가볍게 어딘가 다녀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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