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그림 Aug 12. 2024

미안해. 아빠의 작은 변화

나에게는 근원적인 불안감이 있다. 일이 잘 되고 있어도, 가정이 평온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도 "이 상황이 계속되진 않을거야"라는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내 생각엔 이 역시도 얼마쯤은 어린시절 부모님 사이의 갈등에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얼마쯤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도 여지없이 두 분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기 때문에, 내게 있어 '평화'는 머잖아 찾아올 폭풍을 암시하는 상태로 각인된 건 아니었을까 싶다.


아빠가 우울증약을 복용하면서 확실히 엄마와의 갈등이 줄어들었지만,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반년 정도 (그래도 꽤 긴 기간이다) 별 갈등 없이 잘 지내시는가 했더니,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엄마가 없는 줄 알고 고모와 통화하며 엄마 욕을 실컷 했는데, 그 내용을 엄마가 모두 듣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엄마의 출신지역을 언급하는 비하 발언에 엄마는 말 그대로 뚜껑이 열려버렸다.


내가 현장에 있지 않아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아빠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붓고 이혼을 선언했다. 아빠는 본인이 엄마를 욕하다 걸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크게 대꾸하지는 못했지만, 가만히 있지만은 않으셨던 것 같다. 심각한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제 두 분이 갈라서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대비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적으로 그게 두 분을 위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며칠 뒤 아빠가 엄마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아빠는 내게 불쑥 본인이 엄마아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는 말을 했다. 내 기억에 아빠나 엄마가 서로에게 사과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놀라운 말이었다.


아빠는 어떤 생각으로 엄마에게 사과를 한 걸까. 분명히 본인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엄마도 비난의 단서를 제공했기에, 평소였다면 이렇게 사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싸우고, 부수고, 폭음하고, 스스로를 해치려 시도하는 수순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엄마에게 사과했는지 묻지는 못했다. 아직 나에게는 그런 질문과 답이 오가는 대화가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빠의 노력 덕분에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안하다고 말해준 아빠에게 고맙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빠의 분노에 원인을 제공할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엄마에 대한 아쉬운과 답답함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아빠의 노력 덕분에 이번 문제가 걱정했던 것보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어 감사하다.


아빠의 작은 변화가 약에 의한 것이었든, 단단하게 굳은 노인의 마음에 기적 같은 변화가 찾아온 것이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평화라는 단어가 내게도 영속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행복한 시간을 가졌을 때, 얼마 뒤면 이 순간도 사라지고 어려운 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면 실망도 커질 수 있기에 큰 기대를 품지는 말아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전 12화 40년만에 떠난 아빠와의 첫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