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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Aug 20. 2024

미안하다 말하지 않는 엄마

엄마의 완고함에 대해

결혼한 모든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다수 부부갈등의 원인은 쌍방에 있다. 어느 한쪽이 원인제공을 하겠지만, 해당 사안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나 상대방의 태도, 반응, 그리고 과거 전력(?) 등 모든 요소가 갈등에 영향을 미친다.


결혼하기 전에는 우리 가정의 모든 문제가 아빠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엄마는 고통스러운 피해자이며, 그게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다 보니, 엄마의 문제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역시도 엄마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정의 불화는 아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문제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나에게까지 상처가 된 부분은 '절대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함'이다. 지난 13화에서 밝힌, 아빠가 고모와 엄마의 험담을 늘어놓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의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다.


약 18년 전, 엄마는 꽤 큰돈을 사기당했다. 큰 이자를 약속한 지인(교회 집사였다)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그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엄마로 인해 고모까지 큰돈을 잃었다. 고모가 떼인 돈의 액수는 엄마의 세 배나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나 고모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때도 부부 갈등이 있었는데, 나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와 고모는 사기당한 돈을 찾기 위해 여러 방법을 알아봤고, 그러던 중 변호사로서 그런 일에 경험이 풍부하다는 교회 안수집사와 상담을 하게 됐다. 그분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밟아 돈을 되찾기로 했는데, 수임료와 소송에 필요하다며 요구한 돈을 보내도 오랫동안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조사해 보니 그 안수집사도 사기꾼이었다. 변호사도 아니며, 국내 최고 국립대 출신이라는 말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결국엔 내가 나서야 했다. 진짜 변호사를 선임해 변호사 사칭 사기꾼을 고소하고 재판대에 세웠다. 그리고 교회 내에 그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밝혀 실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도록 했다. 또 앞선 채무불이행자에게도 '지급명령신청'이라는 것을 청구해 채무를 변제해야 하는 시효를 10년 연장시켰다.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힌 채무자에게 법적인 자유를 줄 수는 없다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채무자가 잠적한 지 10년이 넘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이 재기하고 싶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는데, 지급명령으로 인한 법적인 족쇄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채무를 변제하고, 새로운 사업체를 꾸려 돈을 버는 대로 갚아나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데, 문제는 '약간의 변제금'을 어떻게 나누느냐에서 발생했다. 고모는 엄마로 인해 사기를 당했고, 그 금액도 엄마의 3배에 달하니 본인이 조금 더 받아야 하지 않나 하고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나 역시 합리적으로, 도의적으로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엄마로 인해 손해를 입었고, 엄마는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고모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게 맞다고 봤다. 그런 의견을 엄마에게 전하니 엄마는 크게 흥분했다. "돈을 준다는 채무자가 똑같이 나누라는데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고모가 너에게 그렇게 말하더냐?" 이런 식으로 흥분하면서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너는 이 일에 신경 끄라고 일축했다.


나는 이때 엄마에게 실망했다. 지급명령신청도 고모가 나서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행했고, 번거롭게 법원을 오가는 수고와, 신청에 소요되는 법원 수수료도 고모가 냈다. 당시 엄마는 '돌려받지도 못할 돈에 그럴 필요 없다'며 알아서 하라는 태도로 사실상 방관했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약간의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자 자기의 몫을 강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내겐 평소 엄마의 모습 같지 않고 낯설었다. 아빠와 고모가 엄마 몰래 험담을 했던 이유도 엄마의 이런 태도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엄마와 약 1달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내가 엄마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후 나는 늘 엄마와 갈등이 생기면 내가 먼저 다다 갔던 것 같다. 엄마에게 그게 익숙한 게 아닐까.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고, 그게 남편이든 아들이든 상대방이 본인에게 먼저 사과하거나 화해의 재스쳐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걸 더 이상 만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내 생일이 되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아들, 생일 축하한다"라고 문자라도 보내셨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엄마와 아빠에게서 이제 감정적으로 많이 분리되어, 내 가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변화가 건강한 방향이라고 믿는다. 부모님과 교류하고, 자식으로서 보살펴야 할 부분은 보살피되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사랑이라는 줄로 더 강하게 얽히는 것이 바람직한 독립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결국 엄마에게 "과일을 사 두었으니 가져가서 아이들과 먹으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집에 갔을 때 엄마를 만나지는 못했다. 덩그러니 놓인 과일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게 엄마 입장에서는 최선의 사과였을까.


나는 엄마의 이런 완고함, 자존심, 자신이 옳고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태도가 아빠와의 관계에서도 적잖은 문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아빠의 음주, 폭언과 폭력의 악순환이 피해의식으로 자리 잡아 엄마의 이 같은 태도를 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해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내가 무조건 옳고, 미안한 것은 없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남편, 아빠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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