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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Sep 02. 2024

나이 여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아빠의 노력, 그리고 작은 변화들

*커버 이미지는 특정 인물이 아닌, AI로 생성한 이미지임을 밝혀둡니다.


과도한 알코올 섭취로 인한 뇌 수축, 시신경과 관련된 뇌 기능 이상, 그리고 경도인지장애...


내년이면 여든을 맞는 아빠의 뇌 MRI를 본 의료진의 판독 결과다. 그에 더해 우울증도 앓고 계신다. 성적표로 치자면 50점을 밑도는 뇌 상태랄까. 반면 0점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치매나 파킨슨병처럼 장기요양등급을 받아 국가로부터 돌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의료진에 따르면, 뇌 기능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없다. 더 악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도 아빠는 술을 끊지 않았고, 몸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에도 관심이 없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치매안심센터라는 곳이 우리 지역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곳에서 동사무소를 방문해 근처에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검사와 상담을 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아빠를 설득해 함께 가보기로 했다. 아빠는 해보자고 하는 것은 돈만 들지 않으면 웬만하면 따르시는 편이라, 상담받으러 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치매안심센터 직원분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는데, 아쉽게도 참가자가 꽉 차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식 진단서나 소견서가 필요해서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대기라도 걸어 보자는 마음으로 아빠의 다음 진료가 있을 때 병원에 동행해 필요한 서류를 떼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병원 진료일이 다가왔다. 아빠와 병원에 동행해 소견서를 발급받고, 치매안심센터에 연락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치매 예방 프로그램에 추가로 참가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긴 상태였다. 아빠가 싫어하실 수도 있지만, 일단은 참가하고 싶다고 말해두고 아빠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왜 자꾸 나한테 치매라고 그러냐? 그런 건 해서 뭣하냐."


역시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말투가 완강하지 않고, 안 하시겠다고는 하지 않으셨다. "몇 번 가 보시다가 가기 싫으시면 관두시면 되니 한번 해보시라"고 재차 설득하니, 마지못해 "알겠다"는 답을 들었다. 이렇게 아빠의 새로운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프로그램은 매주 2회 진행되고, 참가하시는 다른 어르신들과 모여 만들기, 글쓰기, 노래교실 같은 활동을 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낯선 다른 노인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빠에게는 큰 도전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아빠는 불평 없이 '등교'를 시작했다.


아빠는 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이다. 새벽에 출근하는 일을 40년 이상 하셨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인정해 드릴 만한 장점이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세찬 비가 와서 옷이 비에 젖는 상황에도 빠지지 않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계신다. 다른 분들은 드문드문 결석하기도 했지만, 아빠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 중이시다.


가끔 "요즘은 뭘 배우시냐"고 물어보면, 만들어 오신 부채를 보여주시거나, 낱말이나 문장을 받아쓰신 종이를 보여주신다.


사실 많이 놀랐다. 나는 아빠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가겠다는 답을 듣고도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그만 두실 거라는 걱정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실지는 정말 몰랐다. 비록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해서 건강상의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나에게는 참 고마운 변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회사에서 이런 말을 많이 쓰지만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자발적으로 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을 테다. 그런데 곧 여든이 되는 노인이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내게는 놀랍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엄마를 대하는 태도도 전보다 훨씬 누그러졌다. 전 같았으면 욕설로 받아쳤을 법한 엄마의 신경질이나 무시, 도발성 발언에도 아빠는 화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뭐라도 도와주려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어느 날은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만 누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을 하신다) "엄마가 그 청소기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그것 좀 빨리 바꿔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운 일이다.


무엇이 아빠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우울증 약의 효과일까. 치매안심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한 덕분일까. 어쩌면 교회에서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아빠에게 보여준 존중과 관심 덕분인지도 모른다. 내 사정을 아는 우리 성도들은 아빠를 볼 때마다 마치 VIP를 대하듯 깍듯이 대한다. 들어오시면 맛있는 차를 내어드리고, 식사를 가장 먼저 챙겨드리고, 나가실 때는 건물 밖까지 따라가서 인사해 준다. 이런 모든 것들이 협력해서 아빠에게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빠의 이런 변화가 잠시뿐일 수도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 불안함도 한편에 있지만, 지금껏 내 기억에 없는 아빠의 변화이기에,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기대하면 실망이 클 수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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