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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Sep 18. 2024

아빠는 왜 죽고 싶었을까

언젠가 아빠의 죽음을 추모할 나를 위해

명절이면 나는 아빠를 모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다. 아빠가 거동이 불편해지신 후로는 내가 운전하지 않으면 가실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기에, 주로 단둘이 빠르게 갔다가 돌아오곤 한다.


이번 추석도 어김없이 아빠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성묘 외에 한 가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운전대를 잡았다. 아빠가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브런치에 아빠에 대해 기록하면서 아빠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지만, 어느 날 문득 '죽고 싶은 아빠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최근 생명존중희망재단에서 진행한 '생명지킴이 교육'을 들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이 교육은 말 그대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위험신호를 잘 포착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위한 교육이다.


교육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왜 죽고 싶은지 묻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고, 죽고 싶다는 얘기는 수도 없이 했지만 정작 아빠에게 '왜 죽고 싶은지'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저 인간이 또 저러는구나'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라는 생각만 했지,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근 아빠에게서 나타난 약간의 긍정적인 변화로 인해, 아빠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도 영향이 있었다. 아빠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만큼, 나도 아빠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내 딴에는 큰마음을 먹고, 아빠와 둘만 함께 있고 회피할 곳도 없는 차 안에서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빠는 왜 죽고 싶은 거야?"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질문과 동시에 아빠로부터 짜증 섞인 답이 돌아왔다.


"그런 걸 왜 묻냐.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순순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아빠의 반응을 듣는 순간,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딴에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죽고 싶은 마음이 누그러지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꺼낸 이야기였다.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교육받은 내용이 마치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 배웠다. 어쩌면 지금 현재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려는 상황이 아니기에 효력 없는 질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의미 있는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 채 산소에 도착했다. 비탈진 급경사로를 겨우겨우 오르며 생각했다. 앞으로 몇 번 더 이곳에 오게 될까. 자살을 하든, 노환으로 돌아가시든, 아빠는 머지않은 미래에 돌아가실 거다. 누구나 죽게 되지만, 그의 죽음이 남은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지에 따라서 고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불치의 병에 걸려 돌아가신 분의 가족에게는 사랑과 감사, 미안함, 애틋함이 남겨질 것이고, 가족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고 가신 분의 가족들은 고인의 깊고 큰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힘쓰다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의인의 가족들은 아마도 고인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자살한 부모의 묘를 찾는 가족, 특히 자녀의 마음은 어떨까. "잘 죽었다"라는 마음이라면 아마 묘를 찾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기억에서 지워버리겠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돌아가시지 않도록 돕지 못한 후회도 있을 것이고, "왜 죽었어. 뭐가 그리 힘들었어"라는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원망, 그리고 미안함이 크지 않을까. 자녀들에게는 뭐라 말할까. "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라고 묻는 아이에게, 차마 "할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라고 답할 수는 없기에, 씁쓸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빠가 죽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고 죽지 않도록 돕지 않으면... 나 역시 매년 명절과 기일마다 가슴 아픈 기억과 생각을 반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렀다.


비록 아빠와 마음을 터놓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해야겠다는 마음이다. 바라기로는 아빠가 조금은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고, 생의 마무리를 자살로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훗날 아빠를 기억할 때, 부끄러움이나 후회, 원망이 아닌 "그래도 힘들었던 인생 애써서 견디고 살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찾아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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