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게도 일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아빤 술 드시는 것 외엔 절약정신이 강한 '짠돌이'다. 남이 버린 물건을 가져와 고쳐 쓰시는 게 취미라, 내가 어렸을 땐 그걸로 엄마와 다투시는 일도 잦았다. 고물상처럼 물건을 쌓아두고 분해하고 고치는 게 엄마는 꼴 보기 싫으셨던 거다.
그런 맥락에서 아빤 공짜를 좋아하신다. 지금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료로 이발을 해 주는 사회복지관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신다. 돈도 아끼고, 운동도 되니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어느 날 이발을 하고 돌아오신 아빠는 도시락 배달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들어보니 사회복지관에서 독거노인분들께 나눠드리는 도시락 배달 이야기였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어르신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독거노인분들께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도 다른 노인이 하는 것이었는데, 아빠가 그걸 해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었다. 사회복지관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보시고 관심이 생기신 모양이다.
일주일에 몇 번 정해진 날에 정해진 집을 방문해 도시락을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 비록 걸음이 불편하시고 인지기능 저하도 있지만 수십 년 간 버스운전을 하셨던 만큼 정해진 노선(?)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일엔 자신이 있으셨던 것 같다. 무엇보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아빠에게는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아빠에게 한번 지원해 보시라고 권했다. 길을 잃거나 어딘가에서 쓰러지시지는 않을지 걱정도 됐지만, 한두 번 해보고 그만두시더라도 의욕을 갖게 된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 배달에 지원해 보기로 결정하고 사회복지관에 의사를 전달하니,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일종의 심사를 거쳐서 선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일자리를 얻으러 가는데, 아빠의 겉모습을 보니 너무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도 낡고, 얼굴은 구강암 수술로 생긴 흉터에다가 임플란트를 한다고 빼서 비어있는 앞니 때문에 보기 좋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일자리를 찾겠다고 나선 모양새였다. 면접이라도 보고 선발하는 일이라면 누가 봐도 탈락이 당연한 모습이었다.
아빠에게 새 옷이라도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옷을 어디서 사야 할지 막연했다. 아빤 뚱뚱한 체구에 비해 키가 무척 작으셔서 수선하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옷이 별로 없다. 옷을 사고 수선할 만한 시간도 없었다. 결국 그냥 평소대로 차려입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이력서를 대신할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고 오셨다.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던 아빠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우려했던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집을 보유하신 게 걸림돌이었다. 저소득 계층의 어르신들에게 제공하는 일자리 사업이었던 것 같다. "정작 쓸 돈은 없는데 집을 가지면 뭐 하냐"고 푸념하시면서, 곧 여든을 앞둔 아빠의 일자리 도전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 일은 내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일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데서 큰 동기부여와 에너지를 얻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암투병과 손자 손녀 등하원 도우미로 지내신 시간이 아빠에게는 얼마나 무력한 시간들이었을지 생각해 봤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경제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데, 엄마와의 갈등과 여러 이유로 찾아온 우울감과 자살을 생각하는 마음에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아빠가 일을 하실 수 있었다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내가 아빠나 엄마에게 옷 한 벌도 해 드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의 인색함이 나에게도 이어져, 나도 부모님 못지않게 인색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용돈을 드리면 드렸지 아빠 엄마에게 옷을 사드린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용돈이 쉬운 해결 방법이라면, 옷과 같은 선물은 시간과 정성, 마음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돈에는 인색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쓰는 데는 인색했던 것 같다.
다행히 12월에는 내년 어르신일자리사업이 새로 시작된다. 그 일자리 중에는 재산 보유와 관계없이 지원할 수 있는 자리들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아빠에게 물어보니 조금이라도 일당을 받으실 수 있는 일이라면 해보고 싶으시다고 하신다.
만약 아빠가 지원해서 일을 시작하게 되시면, 나이 80에 경력이 단절된 지 약 15년 만에 다시 일을 하게 되시는 거다. 아빠에게는 새로운 목표와 도전이 될 것이다. 이번엔 지원하기에 앞서 좀 더 뽑고 싶은 어르신 인재(?)로 보일 수 있도록, 미리 옷도 사드리고 단장시켜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