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정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by 별빛바람

이 세상은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 존재한다. 제자들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위해, 이 세상의 밝은 미래를 위해 그들은 헌신하고 자신을 불태우며 교육 현장에 거목과 같은 존재로 우뚝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훌륭하지만은 않다. 그건 선생님뿐만 아니라, 종교인도 마찬가지며,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생님이란 직업은 "먼저 살아오며, 앞 길을 제시해 주는" 인도자와 같은 역할이 아닌 그냥 직업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매타작은 자신의 수확물을 획득하기 위한 육체노동의 한 단계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직업인으로서 교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고, 이상하게도 부유하지 않은 동네일수록 더 많이 있어왔다. 내가 막상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일본 스타일의 이름(~子)을 가지고 계셨던 정년이 2 ~ 3년 정보 밖에 안 남았던 담임 선생님은 항상 거대한 각목을 들고 계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단 하루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데 그건 바로 입학 첫날이었다. 한 껏 검은색 정장에 왼쪽 가슴에는 브로치를 달고 왠지 온화한 할머니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선생님은 "연륜"있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다들 안심하며 자녀들을 맡겼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모습은 그때뿐이었다. 입학 다음 날, 선생님은 거대한 각목을 들고 와, 아이들에게 힘껏 소리쳤다.


"모두 손 무릎에 올려놓고, 눈 감고 있어!"


그 선생님은 시끄러운 걸 싫어했고, 특히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수다를 싫어했다. 언제나 아이들은 손 무릎 혹은 손 머리를 하며 있어야 하고, 무언가 만들 때도 - 혹은 받아쓰기를 할 때도, 혹은 수업을 들을 때도 당연히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10분 정도 쉬는 시간일 때는 당연히 더더욱 조용히 있어야 했다. 수업이 끝난 뒤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 외의 시간에는 손 무릎 혹은 손 머리가 필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였다. 선생님의 강력한 지시사항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고, 왜 조용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쉴 새 없이 떠들기 바빴으나 선생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


우리는 항상 주먹 쥐고 엎드려뻗치거나, 아니면 선생님이 들고 온 각목을 휘두를 때마다 손바닥 혹은 엉덩이, 종아리, 장딴지 등등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매 타작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매타작의 나에게로 다가온 것은 4월 어느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엄마가 멋지게 다려준 정장과 같은 옷을 입었을 때였다. 빨간 넥타이도 달려 있으니 멋진 영국 신사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그 옷을 입은 나는 짝꿍에게 "옷 멋지지 않니?"라는 말을 했었다. 여자 짝꿍이었으니, "흥~" 아니면 "별꼴이야..." 정도 이야기를 하고 끝냈던 것 같다.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이었을 때였다. 그때 마침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교탁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러고 나서,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1학년이었던 아이는 엎드려뻗쳐가 어떤 건지도 몰랐고, 주먹 쥐고 엎드려뻗친다는 것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손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니 순간 무릎을 꿇을 때였다.

선생님은 지긋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주먹으로 구둣발로 짓이겼다. 손은 발자국을 넘어 벌겋게 부어오르다 살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인자하던 할머니와 같은 얼굴은 마귀할멈과 같은 얼굴로 바뀌었다. 그 시절 교실 바닥은 지금처럼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었으니 나무가시에 찔리며 구둣발에 짓이기며 손이 찢어지기 시작했으니 그 고통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소리를 질렀으나, 선생님은 그 순간 각목으로 내 엉덩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넌 학교 와서 떠들기만 하더니, 이것도 똑바로 못하니?"


그리고 선생님은 4교시가 끝날 때까지 주먹 쥐고 엎드려뻗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선생님은 아침 일찍 나를 부르더니 노란색 주전자에 물을 가득 떠 오라 했다. 대략 5리터쯤 되었을 양이었을까?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전자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으니 약 2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물을 채운 주전자를 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려 했지만 그 주전자는 너무나 무거웠다. 두 손 힘껏 들어 올렸지만 그 주전자를 들고 걸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정도 걷다가 너무 힘들어 바닥에 주전자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려놓은 주전자에 물이 넘쳐흐른다. 그 순간 주전자에 넘쳐흐른 물이 내 옷을 듬뿍 적신다.

바지가 젖고, 윗 옷이 젖는다.

그래도 힘껏 주전자를 들고 한 걸음... 두 걸음...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의 힘으론 들고 갈 수 없었다.


약 1시간쯤 걸렸을까? 나는 옷이 흠뻑 젖은 상태로 교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전자의 물은 절반정도 흘러내렸을 때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선생님은 나를 보며 격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 병신 보래요. 주전자에 물 떠 오라 했더니, 물을 버리고 왔데요. 너 같은 새끼는 쓸모가 없다. 저쪽 끝에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


그리고 난 젖은 옷에 부들부들 떨며 벌을 설뿐이었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다. 다음날도 주전자에 물을 뜨고, 그리고 젖은 상태로 엎드려뻗친다. 며칠이 지난 뒤, 그 5L 주전자는 6학년도 두 명이서 들어야 할 정도 무게였으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들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언가 목적이 있었는지 그 목적을 향해 매일 나에게 주전자를 들게 하였고, 엎드려뻗치게 하였다. 며칠이 지나니 검지 손톱이 시커멓게 변했다. 어느 날인가 내 손을 보았던 엄마는 손등이 다 터지고, 옷의 무릎이 새까맣게 변했던걸 알고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난 한참을 머뭇거리다 학교에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한참을 다그친 뒤 그다음 날 학교로 찾아갔다.

선생님은 학교 수업을 제처 두고 엄마를 위해 교무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하얀 찻잔에 프림 커피 두 잔을 준비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야길 한다.


"아드님이 참 똑똑해요. 하지만..."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이야기했다. 이불도 필요하고, 커튼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이맘때쯤이면 학부모가 김치를 담가주기도 한다고 했다. 아니, 노골적으로 돈 봉투를 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을 했다. 아니, 어떻게 챙겨줄 수 없었다. 그만큼 챙겨줄 돈도 여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살던 그 동네는 그랬다. 하지만, 그 시점에 스승의 날이 되자 그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다른 아이 학부모들은 이불이며, 커튼이며, 김치며, 돈이며 이것저것 챙겨서 스승의 날 선물을 챙겨 왔다. 아이들은 줄을 서서 선물을 챙겨줬다.


"그래. 뭔지 정성이 보이는구나. 어머님이 이불을 준비하셨니?"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날의 선물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차례였지만 난 선생님께 드릴 선물이 박카스 한 박스 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몇 달 공들인 매타작의 수확이 고작 박카스 한 박스란 걸 알고 실망했는지 그 이후로는 출석부 모서리나 각목으로 내 엉덩이를 타작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게 나의 초등학교 1학년의 일상이었다. 나의 첫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었다.

누구나 첫 시작에 대한 인식이 영원히 그러하듯 나의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그랬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다시 재수 시절 진학 지도 교사와의 추억이었다. 그는 일반사회와 경제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님이었고, 서울대 경제학과와 사범대를 복수 전공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분이었다. 매주 일요일마다 친목 모임과 함께 등산을 했으며, 월요일이면 등산을 갔다 와 땀 냄새가 절었는지 그 냄새가 온통 진동하곤 했다. 그 선생님은 매년 목표는 학생들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울대를 몇 명 진학시키고, 학교 플래카드에 자랑스러운 서울대 후배들의 명단을 걸어 놓는 것이 그 해의 목표라고 생각하였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내가 재수를 하던 그때는 수능이 너무 어려웠는지 서울대를 목표로 했던 친구들이 진학을 실패했을 때였다. 당연히 누군가 한 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는지의 목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자신의 범위 안에 있지도 않던 학생이 다가오니 그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1학년 때부터 서울대를 향해 준비를 시켰던 학생들을 대신해 나와 같은 학생이 다가오는 것이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유리 천장은 사회가 만드는 것이고, 누군가의 관념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당연히 조금만 더 노력하고 - 조금만 더 다가가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유리 천장"이라는 틀 안에 갇혀 그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지내왔었다. 그리고 그 일부는 "교사"라는 직업인들의 역할도 컸다. 당연히 그 유리천장을 위로 높이기 위해 재력이 있었던 학부모들의 노력으로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군가의 천장은 낮아져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송곳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송곳은 조금만 치더라도 유리는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이치를 깨 닳는 순간 우리는 점점 위로 날아올라 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난 처음으로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의해 정해졌던 그 법칙을 깨 버리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유리 천장이 더 이상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 천장은 더 높은 곳에도 존재했었다. 대학 시절도 그러했고, 직장생활도 그러했다. 그리고 군시절도 그러했다. 이제 이 이야기는 20대 이후 성인이 된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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