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교 행사라 말하기도 민망한 입교 행사가 끝난 뒤, 우리는 정신없이 전투복과 보급품을 받는다. 내 사이즈가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충 눈대중으로 골라야 했다. 장교도 이런 환경인데, 사병들의 환경은 어떨지 눈에 보였지만 그저 우리는 눈짐작으로 사이즈를 챙기며 전투복과 군화, 속옷들을 보급받는다. 인당 휴지 몇 개, 비누 한 개, 칫솔 한 개, 치약 한 개. 모든 건 정확히 개수에 맞춰 똑같이 배분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진해 해군사관학교에 잠시 입교 행사 때문에 모여있을 뿐이었다. 실제는 해병대 장교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환경은 여기보다 더욱 열악했다. 그나마, 해군은 침대가 있었고 4인 1실 생활이었지만, 해병대는 구형 내무실에서 1개 소대가 모포 안에서 잠을 자야 했으니 똑같은 장교라 하더라도 더욱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었다.
군화는 총 두 개가 지급되었고, 전투복도 두 벌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군복과 군화를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군대는 "아쎄이" 문화가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A급 중 S급 - 새 거와 같은 걸 아쎄이라 불렀다. 물론, 신병도 아쎄이라 하긴 하지만 장구류는 아쎄이 혹은 A급을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군대는 수많은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행사에 착용해야 할 군복과 군화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옷은 절대로 입을 수 없었다. 당연히 다림질도 되어 있고, 새 거와 같은 상태지만 행사 때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단 한벌만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나마 훈련 기간에 느 그 옷을 입을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종교행사나 교육을 들을 때 입어야 할 옷이었다. 보통 이 시점에 입어야 할 옷은 CS복이란 걸 입었다. CS복은 쓰레기장에서 주워왔을 것 같은 상태의 전투복이다. 당연히 세탁을 했을 리 없으며, 몇 년 아니 몇 십 년 동안 그저 물려받아가며 입었을 뿐이다. 이 옷은 더더욱 사이즈를 골라 입을 수 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상의와 하의를 골라 입어야 했다. 나도 두 벌을 챙겼다. 옷에는 이미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옷을 챙겨갔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환경이 동일했다.
해군의 함정 문화가 있기 때문에 6시 기상이었지만, 15분 전인 5시 45분에 집합을 해야 해야 했다. 해군의 함정 문화는 정해진 시간에 모든 걸 준비 완료한 것이 아닌, 바로 항해를 떠나는 시간이기 때문에 15분 전에 완료를 해야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5시 45분에 눈을 뜨고 연병장에 집합해야 하니, 기상 방송은 5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입교 후 첫날 5시 30분에 울리는 기상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어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대학원 시절 밤을 새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늦은 밤까지 훈련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군이 다 마무리할 수 있지?"
난 그 당시 운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있는 이 선배를 대신해 지도교수였던 김 교수의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했다. 리포트 검사, 교안 준비, 시험 감독 및 채점은 내가 해야 할 몫이었다. 그나마 교안 준비는 편했던 게 김 교수는 강의를 하는데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10년째 교제는 동일했으며, 강의를 할 때 교제를 활용하는 PPT 슬라이드는 책의 내용 중 중요한 내용을 타이핑하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강의를 하기 전에 미리 교안을 점검하지 않았던 것은 제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10년째 동일한 교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하지만 김교수는 다른 거에 욕심이 많았다. 본인이 PPT를 열었을 때 무언가 디자인이 화려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PPT가 버전 업이 될 때마다 새로운 버전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맞춰 업데이트를 해야 했다. 결국 내용은 같았지만 해야 할 일은 존재했다.
리포트나 시험 문제는 매년 똑같았다. 학부생 때는 "족보"가 먹혀드는 유일한 과목이었으니 마음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족보"만 가지고 시험 문제를 출제해야 하니 내가 이 자리에서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이 선배는 김교수와 대외 활동을 많이 했다. 운전을 할 줄 알았으니 대리운전기사 역할을 톡톡히 하며 얻게 된 타이틀이기도 하지만, 나름 김교수는 외부 인사들을 만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 덕에 많은 인원들과 좋은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난 그저 연구실에 앉아 리포트 검사와 교안 준비, 시험 감독만을 했을 뿐이었다. 김 교수는 술자리를 가기 전 늘 같은 이야길 했다. 그리고 나는 "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며 묵묵히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늦은 밤까지 리포트 검사와 시험 문제 채점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면 늦은 새벽이 돌아왔다.
난 군대를 가기 전 따로 운동을 준비했던 게 아니라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모든 보급품이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민간인도 군인도 아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기 때문에 군법에 적용을 받지만, 너희들이 퇴교를 한다 하면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보급품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돈을 내야 했다. 우린 월급을 받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훈련 기간 동안은 "품위유지비"란 명목으로 약 30만 원의 돈을 받았다. 하지만 그 곤은 그저 명목일 뿐이었으며, 그 돈을 가지거 다시 여리 용도로 돈을 차감해 갔다. 손톱깎이 가격, 옷걸이 가격, 세탁 가격, 다림질 가격, 오바로크 가격 등등 돈을 차감하는 명목은 다양했다. 그중 가장 황당했던 돈은 옷걸이였다. 세탁소에서 세탁을 맡기면 당연히 공짜로 챙겨주던 그런 수준의 옷걸이를 처음 체스터에 보관 명목으로 5개를 보급받았으며, 그 보급의 명목으로 비용을 차감했다.
손톱깎이는 인당 몇 천 원씩 차감을 했지만, 실제 돌아온 손톱깎이는 한 소대에 하나 밖에 지나지 않았다. 세탁도 김칫국물이 묻은 그대로 돌아올 때가 많았으나, 한 벌 세탁을 하는데 몇 천 원이라는 돈을 납부했지만 그 돈이 정말 제대로 사용이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즉, 부조리는 여기서 나왔다. 우리가 차감되었던 돈 중 대부분은 실제 그걸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했다. 당연히 그 돈 자체는 윗사람들의 떡값이란 명목으로 사라져 갔다. 그저 장교교육대의 사관후보생의 돈을 가져가는 게 명목상 쉬웠을 뿐이다.
임관 후 1년이 지났을 때, 해군 사관후보생 장교교육대장이 해당 문제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군 사관후보생을 대상으로 옷걸이 하나강 몇천 원, 세탁을 하지 않았으나 세탁 가격을 부풀리는 등 여러 명목으로 품위유지비를 강탈해 갔다. 특히, 그 문제는 내가 입교한 기수를 대상으로 더욱 심하게 가져갔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욱 불거졌다. 당시 동기회 게시판에는 그 문제로 시끌벅적 했다. 일부는 군대의 관습이니 넘어가자 했고, 일부는 우리의 피 같은 돈을 돌려받아야 하지 않냐 했다. 구차하게 장교교육대장은 전역 전 당시 사관후보생들을 불러 모아 술과 밥을 얻어먹고, 일장 연설을 하며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에게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 2주 동안 해군과 같이 생활했으니 일부 급여는 해군에서 차감을 했었겠지만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나마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존재였으니 우리는 그 시절의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