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2화
지이이잉, 원두가 갈리는 소리.
그리고... 치이이잉 하며 스팀이 뿜어져 나오다...
지이이잉 하며 뽀얗게 거품을 만들며 내려오는 검은색 액체.
그 검은색 액체를 아무 말 없이 물이 담긴 잔에 붇는다.
당시 유행하던 커피숍에 앉아 커피 한잔씩 시켜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대학생 시절. 그때의 커피는 씁쓸한 맛보다 다른 향이 좋아 마시곤 했다. 어떤 이는 헤이즐넛 커피. 어떤 이는 모카커피. 그리고 가끔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커피 향과 어우러져 나오는 독특힌 향기. 거기에 설탕 듬뿍 넣어 달콤함을 더하며, 커피숍 알바는 달콤한 계피맛 쿠키를 커피 한 잔당 하나씩 내어 놓는다. 때론 커피숍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기도 하고, 때론 과자를 나눠 먹으며 달콤한 커피 한 잔일 벗 삼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두며, 걱정 없이 지내던 그 시절. 그때 나는 무십코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어디서 들어본 듯 한 이름. 분명 책에서 본 것 같다. 아마 "먼 나라 이웃 나라"였던가? 이탈리아 사람은 작은 잔에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며 마신다 했다. 나도 그걸 따라 하고 싶었는지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작은 잔에 담겨 있는 에스프레소. 입에 가까이 대니 한약보다 더 쓴 맛. 찻잔 옆에 놓여있는 각설탕 두 개를 넣고, 거기에 각설탕 하나를 더 넣어, 설탕 시럽같이 될 정도로 설탕을 넣어 찻 숟가락으로 열심히 젓는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눈치를 보며 조금씩 입을 대는 내 모습. 나도 처음 마시고, 친구들도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한가 보다. 에스프레소 눈곱만큼 한 모금을 마시며,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그 시절. 지금도 장사를 하는 학교 근처 "엘빈"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의 그 시절.
만원 지하철을 뚫고 지하철 역사를 뛰쳐나오면, 회사 근처 커피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예전과 같이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펼쳐지는 레이스 커튼이 있던 그런 커피숍은 다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커피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 줄을 잇는다. 무인 키오스크에 나와 있는, 이름으론 도저히 추정하기 힘든 그 커피들. 이 커피는 왜 라테이고, 왜 모카이며, 왜 바닐라 라떼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단지, 여기에 그 커피가 있고, 그중 자신의 마음이 드는 커피를 골라 마시곤 한다.
오늘 하루도 커피로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가정용 커피머신의 버튼을 눌러 유사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어차피, 가정용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압력이 강하지가 않아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는 커피맛과는 사뭇 다른 맛을 만들어낸다. 당연히 온수 버튼을 눌러 뜨거운 온수를 추출한 물 탄 에스프레소가 오늘의 시작이다. 물의 비율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진한 맛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 양이라도 맞춘다. 때론 땀으로 흠뻑 젖은 아침에는 냉동고에 있는 얼음 몇 개를 꺼내 차가운 물 탄 에스 페레 소를 만든다.
누군가 그랬던가?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에 맹물을 섞으면 그것도 이름이 있다고. 그래. 그 이름이 바로 "아메리카노"라 불렀다. 하지만, 내각 마시는 커피는 단지 "아메리카노"의 맛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다. 커피가 품고 있는 카페인이 그립기 때문이다. 분명 저녁 먹고 TV도 보지 않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왜 이리 피곤한지. 지하철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지하철 역사를 나오자마자 사는 물 탄 아메리카노. 각 가게마다 레시피도 다르고 맛도 다르니, 이게 정말 표준의 맛이라 정하기도 어렵다. 단지, 각각 머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압력의 기술과 바리스타의 감으로 넣는 물의 양이 조화가 되어 물 탄 에스프레소는 진한 아메리카노가 혹은 밍밍한 아메리카노가 되어 아침을 반긴다.
자리에 앉아 흘린 땀을 닦고 노트북 컴퓨터를 켜며, 스트로에 입을 갖다 대며 힘차게 물 탄 에스프레소를 들이켠다. 오늘은 너무 더운 날씨라 얼음 많이 넣은 시원한 물 탄 에스프레소. 씁쓸한 맛과 함께 카페인이 함께 섞여 혀끝을 맴돈다. 그리고, 잠시나마 한 모금 들이 길 때 느껴지는 맑은 기분. 하지만, 이 물 탄 에스프레소도 첫 잔은 상쾌하게 만들지만, 한 잔, 두 잔, 세 잔이 지나면 오히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몽롱하기만 하다. 그래도, 난 물 탄 에스프레소에 중독이 된 듯, 하루에 최소 세 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들이켠다.
그 옛날 친구들과 함께 마시던 커피. 그 커피는 분명 마시기 위해 마신 게 아니었던 거 같다. 향을 느끼며, 그 향에 취해 마시던 그 커피. 가끔은 프렌치 프레스 커피를 시켜, 몇 분 동안 우려내는 시간을 기다리며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 고소한 헤이즐넛 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나를 미소 짓게 만들던 그 순간. 때론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아이리쉬 커피에 약간의 위스키가 들어갔다 이야기를 하며 마시던 그 시절. 위스키의 강렬한 향과 시럽의 달콤한 향이 어우러지던 그때. 그 시절 커피는 단지 향을 만들어내는 도구였을 뿐, 진정한 메뉴는 커피숍에서 만들어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다. 어떤 이야기든 중요하지 않다. 살아가는 이야기. 친구의 여자 친구 이야기 혹은 남자 친구 이야기. 혹은 최근에 쇼핑을 갔을 때 구경하였던 멋진 신발에 관한 이야기 등등. 때론 내가 관심 없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소하고 달콤하고 강렬한 다양한 향에 취해 그 이야기에 경청을 한다. 때론 매 쾌한 담배 연기마저도 향기를 만들어내던 그 시절.
하지만 물 탄 에스프레소는 중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질 않는다. 물 탄 에스프레소가 만들어내는 것은 노트북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눈과 열심히 손가락이 가리키며 눌러대는 자판의 결과물들.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우스와 틀 안에 갇혀 있는 마우스 커서들. 그 들의 조화를 좀 더 활기차게 만들 뿐. 물 탄 에스프레소가 그 시절의 즐거움을 만들어내진 않는다. 오히려 컴퓨터를 켜면 나타나는 수많은 엑셀 시트와 워드 파일들. 거기에 나타나는 숫자들과 글자들의 조합을 이끌어 낼 뿐이다.
물 탄 에스프레소는 이미 향기를 잃어버린다. 거기에 차가운 물과 섞이게 되면, 그 향은 점점 사라지고 쓴 맛만 남는다. 그 시절 향긋한 향기를 만들어내던 그 커피. 하지만 지금은 향기는 더 이상 만들어 내지 않는 존재감 없이 사라진 물 탄 에스프레소. 커피란 이름을 잃어버린 "아메리카노"란 이름을 가지며 단지 들이키기 위한 존재로,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한 존재로 남을 뿐이다.
그때부터였나? 내 이름이 불리기보다, 어느 순간 내 업무가 불리기 시작한다. 마치 에스프레소가 커피라는 본연의 이름에서 물을 탄 순간 "아메리카노"가 된 순간처럼. 각각의 고유한 개성은 사라지며, 마치 물 탄 에스프레소처럼 내 개성은 점점 사라진다. 나의 남다른 생각. 나의 남다른 고민은 이제 사라지며 회사에서 생각하는 일반적인 고민과 일반적인 미래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 모든 목적과 독특한 고유의 향기는 사라진 채, 씁쓸한 맛과 카페인만을 남긴 물 탄 에스프레소처럼.
오늘 하루 나와 함께한 물 탄 에스프레소 잔이 점점 쌓일 때쯤. 오늘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정말 힘든 하루를 보내며, 정말 지친 하루를 보내며, 다시 만원 지하철에 내 몸을 맡기며, 오늘 하루를 보내기 시작한다. 물 탄 에스프레소의 강렬한 카페인의 기운은 회사 문 밖을 나가는 순간 그 약효를 다 해 간다. 마치 물을 탄 순간 카페인의 함량도 물에 희석되어 점점 약해지는 듯. 그리고 간단히 저녁밥을 먹고 침대에 눕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눈이 감기데 된다. 그리고 내 몸은 다시 한번, 내일 아침의 물 탄 에스프레소를 기대하게 된다.
언제나 피곤함에 지친 우리들. 그 피곤함을 이겨내고자 들이키는 씁쓸한 물 탄 에스프레소. 아니 아메리카노. 그 음료에 담긴 미약한 카페인에 내 몸을 맡기며,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