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3화
우와! 난 검은색 볼펜인데, 넌 삼색 볼펜이라고?
우와 넌 12가지 색이네?
어린 시절. 마치 로켓처럼 생각 여러 가지 색 볼펜. 누군 4 가지 색인데, 누군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어서 12가지 혹은 20가지 색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색이 왜 필요한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볼펜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쁘게 연필 깎기가 아닌 칼로 깎은 연필을 매일 아침 검사하였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언제 나왔는지 모를 볼펜들이 튀어나와 각자의 자태를 뽐낸다. 난생처음 보는 핑크색을 그리는 볼펜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 볼펜이 만들어 내는 것은 어지러운 동그라미들. 그리고 작은 모눈종이를 색깔별로 채우며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 가끔은 수성 사인펜을 가지고 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수성 사인펜은 손에 묻을 수 있어 색깔 볼펜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 어느 한 친구가 가져온 하얀 뚜껑의 화이트. 화이트가 나오는 순간 매 쾌한 신나 냄새가 퍼지긴 하지만, 그래도 흰색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그려본다. 어떤 친구는 낡은 학교 책상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공책 표지에 볼펜으로 이쁘게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때론 교과 서명을 바꾸는 데 사용하기도 하는데, 딱히 누구한테 배워서 했다기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이게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희였으리라. 단지 색깔 볼펜 하나로 재미를 찾던 그 시절의 모습.
물 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자리에 앉아 연필꽂이를 바라본다. 30Cm 자, 가위 그리고 딱풀이 꽂혀 있으며, 스테이플러가 한 개 옆에 놓여있다. 그리고 다들 모양은 다르지만, 각 자리에 한 자루 혹은 두 자루씩 꽂혀 있는 삼색 볼펜. 아마 MRO 구매를 통해 들였을 것이다. 빨간색 / 파란색 / 검은색의 볼펜은 함께 놓여있는 수첩과 함께 단짝을 이룬다. 이 회사는 다들 "회의주의자"들인가?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다 회의를 소집한다. 크게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회의를 자유의사에 참석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팀장 혹은 상무님의 말씀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또다시 다른 색 볼펜을 딱딱 거리며 필기를 한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이 사업적 의사결정에 마치 도움이 되는 양 적기 시작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삼색 볼펜. 마치 직장인이 되고, 회사원이 되었다는 징표인 마냥 회사에서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삼색 볼펜을 수여한다.
어린 시절 좋은 장난감이며 유희 도구였던 삼색 볼펜. 왠지 내가 예술가가 되는 기분이 들고, 왠지 평생의 친구와 같았던 삼색 볼펜은 이제 어떠한 감정도 사라진채 회사에서 주어지는 모든 대화와 이야기만을 기록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어떠한 생각도 필요치 않는다. 이곳에 빨간색을 사용하고, 이곳에 파란색을 사용하면 참 아름다울 것 같지만, 삼색 볼펜은 단지 회사에서 준 수첩에 영혼은 사라진채 회사에서 주어진 내용만 작성할 뿐이다. 내 판단과 감각과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주어진 것만 잘 정리하고 잘 표현하면 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끝까지 다 써본 적은 없다. 마치 직장인 모두의 공용 볼펜이 된 듯.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책상 위에 놓여있으며, 가끔은 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주인 잃은 삼색 볼펜은 그나마 마음씨 좋은 다른 직장인을 찾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만남마저도 사라지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쓰레기통 행. 그 쓰임이 다 하지 못하고 용도 폐기되는 삶이 될는지, 혹은 그 쓰임을 다 하고 좋은 주인을 만나 리필 심까지 하사 받는 행복한 삶이 될지는 순전히 각자의 운명에 따라 다른 결과가 주어지게 된다.
며칠 전 함께 소주를 마시던 선배 한 분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그리고 같이 커피 한 잔 마시지 않겠냐고 이야길 한다. 이미 아침에 두 잔 넘게 마셨지만, 그 선배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여 함께 카페테리아로 간다. 시원한 물 탄 에스프레소, 아니 아메리카노를 두 잔 주문하고 기다리며 회사 이야기. 생활 이야기. 성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 선배는 어렵게 이야길 한다.
"나. 다음 주에 회사 그만둬. 퇴사한다."
한평생 회사를 위해 헌신하고, 나의 멘토와 같았던 그 선배. 내가 하던 일의 대부분을 알려주었던 그 선배는 정말 이 회사에서 경영진이 되어 회사를 이끌어갔으면 할 정도로 나에게는 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선생님 몰래 숨겨놓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삼색 볼펜처럼. 내가 어려울 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힘들 때 소주 한잔 기울여주며, 회사에서 어려운 이야기 - 힘든 이야기 다 함께 공유해 주던 그런 선배의 모습은 마치, 쓰레기통에 던져진 다 사용하지 못 한 삼색 볼펜의 운명과도 같았다. 딱히 회사에 적응을 못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침 굵직한 일들을 하며,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잡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선배의 모습은 무거운 어깨의 짐을 지운 당나귀와 같이 축 늘어진 표정을 한다. 웃으며 이야길 하지만, 오늘만큼은 물 탄 에스프레소. 아니 선배와 함께 마시는 아메리카노의 맛이 더욱 쓰게만 느껴진다.
나름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왜 그만두는지 이야기를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단지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가 결론은 "아무래도 여기 있는 건 더 시간 낭비인 거 같아."라는 말을 하며 끝 마무리를 한다. 회사에 있는 것이 시간 낭비인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시간 낭비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 선배 이야기의 결론은 내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의미 없는 떠나기 전에 식사 한 번 하자. 그리고, 퇴사해도 종종 연락드리겠다는 아무 의미 없는 인사치레 성 멘트들. 삼색 볼펜이 수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써가던 의미 없는 내용들. 절대 그 수첩을 뒤져서 볼 일이 없으니, 단지 졸지 않기 위해,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사용하는 유희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 없는 회의 때마다 함께 따라가던 삼색 볼펜과 수첩. 하지만 그 수첩을 다시 펼쳐볼 일 없으니, 어린 시절 쉬는 시간 선생님 몰래 꺼내서 낙서를 하던 그 삼색 볼펜과 동일한 용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분명 팀장님도, 임원들도 삼색 볼펜으로 끊임없이 끄적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기도 하고, 지루해서 낙서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지 모른다. 그 당시 선생님도 소지품 검사를 하였지만, 몰래 숨겨둔 볼펜까지 억지로 찾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아무래도 그 볼펜마저 없다면 지루한 학교 수업을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지루한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