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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pr 22. 2020

여자들 간의 대화

대화의 원리. 12화

뉴욕에 학교 대표로 한 대회에 참여했을 때였다. 함께 간 동생들이 갑자기 묵고 있는 호스텔에서 내가 같은 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Victoria's secret 속옷을 사 와서 서로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야, 나 남자고 이 방에 있는 거 안 보이냐?'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요'라고 하더라.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그냥 대학 선후배, 같은 학회 선후배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란 말인가?


항상 조금 그런 편이었다. 처음엔 너무 무뚝뚝하고 전형적인 한국 남자 같아 보였다가 친해지면 오빠가 아닌 언니가 되는, 남자 친구와 스킨십 등으로 인해 엄청나게 힘들었던 일을 갑자기 내 앞에서 털어놓으면서 펑펑 울었던 여사친들이 주위에 적지 않았던 남사친. 그래서 보통의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대화와 여자들의 생각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아는 편인 건 사실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날 언니 취급을 했다 하더라도 남자이기 때문에 사실 '여자들 간의 대화'에 대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나 역시 내가 들은 것들을 정리할 뿐이고, 그녀들의 말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여자들의 대화가 이런 것 같다'는 식의 추측과 예상을 정리하는 것이 남자인 나의 한계다. 


나를 언니 취급하는 여사친들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연애나 결혼 안 해도 잘 살 수 있지 않아? 여자들은 본인들끼리 대화하면서도 충분히 공감을 주고받으면서 정서적인 위로와 치유도 경험하잖아'라고. 사실 남자의 입장에서 나 혼자 남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인 상황에서 여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만큼 신기하면서도 지루한 경험도 없다. 


뭐를 먹었고, 뭐를 샀고, 뭐를 했고, 남자 친구가 이랬고, 썸남이 저랬고, 교수는 이렇게 저렇게 했었다가 또 직장인이 되면 상사가 이리저리 했고.... 


대화의 주제도, 목적도 없이 A라는 주제에서 B라는 주제로 갔다가 Z에서 다시 A로 오는 대화가 처음엔 신기한데 들으면 들을수록 몰입이 안되고 나중에는 '아니 무슨 이런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걸 보면 난 언니가 아닌 오빠임에 틀림없다. 물론, 모든 여성들의 대화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여성들의 대화가 그렇더란 것이다. 그런 대화 자체가 맞지 않아서 복잡한 여자들보다 단순한 남자들과 대화하는 게 편하다는 여사친들도 적지 않게 봤다.


여자들은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든 것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여자들의 모습이 남자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자신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쏟아낸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듣고 보이는 반응에는 큰 차이가 있더라. 남자들은 보통 상대의 말을 듣고 나서 그걸 반박하거나 분석하고 조언을 주기 위한 시도를 하지만 여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감탄사를 뿜어내더라. 그리고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모두 공감해주고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은 '그래도 남자 친구랑 여자인 친구는 다르지'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추측은 가능했다. 여자들 간의 대화에는 공감이 엄청나게 많이 오갔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경쟁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은 그 자리가 파한 후에 그 앞에서는 100% 공감해주던 친구가 상대가 말한 것에 대해서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여자들 간의 대화는 100% 긴장을 풀고 속에 있는 것을 다 꺼내서 하는 대화는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 


물론, 정말 친한 여자들 간의 대화는 다르다. 나는 남자들이 다른 남자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같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본적이 거의 없는데 정말 친한 여자들은 서로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것을 꽤나 자주 봐왔다. [골드미스]는 있지만 [골드미스터]는 없는 것도, 여자는 혼자 살아도 더 멋있어질 수 있지만 혼자 사는 남자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급의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이 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여자들은 굳이 연애를 하지 않아도 일정 수준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성 친구들이 있지만, 남자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모든 여자들의 대화'에서 그렇게 공감대만 형성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여자들 간의 대화는 남자들의 대화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남자들의 대화는 사실 단순하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여자들의 경우 진심으로 공감하고 동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판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거나 상대와 불편해지기 싫어서, 또는 본인이 그 자리에서 없어 보이기 싫어서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여자들의 대화는 훨씬 더 복잡하고 맥락을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해진다. 

 

그래서 여자들의 대화에서는 말하기는 물론이고 듣기와 눈치의 삼박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 친구가 '그래도 남자 친구랑 여자인 친구는 다르지'라고 한 것은 어쩌면 그런 맥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남자 친구에게도 가능하면 본인의 좋은 면을 중심으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은 하지만 그녀들도 여자인 친구들과의 대화보다 조금은 더 편하고 느슨하게 남자 친구에게 본인의 얘기를 꺼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연인 간의 대화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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