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랑에 대하여. 16화
이 글에서 풀어낼 내용을 쓰려고 했던 것이 직전 글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되나, 그런 생각들이 놓치고 있는 것과 아이가 존재 자체로 부부관계에 할 수 있는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 쓰고 나니 분량이 너무 길어져 별도의 글을 쓰게 됐다.
아이를 갖지 않을 이유는 분명하다. 힘들고, 피곤하고, 키울 여력이 안되고, 조금 더 거룩한 척하려면 '이렇게 험악하고 피곤한 세상에 생명체를 낳는 것은 그 아이를 위해 못할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차라리 앞의 이유들은 이해도 되고 수긍할 수 있으나 마지막 이유를 들으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비웃음을 날려주는 편이다. 이는 사실 앞의 이유들 때문에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데 그걸 포장하려는 노력으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부모가 충분히 사랑해주고, 존중해주면 그 아이는 건강한 자아를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거칠어도, 심지어 전쟁통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있다. 차라리 본인이 감당이 안될 것 같다고 인정하는 게 비겁하지 않아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아이를 갖지 않을 이유로 가장 많이 들리는 이유는 '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데 아이에게까지 돈이 들어가는 걸 감당하지 못하겠다'가 아닐까 싶다. 힘들고, 피곤하단 것도 사실은 [일하고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피곤한데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연령대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결혼을 해도 금전적, 물질적 문제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의 경우 거기에 커리어 생각까지 해야 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이고 금전적인 데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생계가 해결되고 어느 정도의 예측가능성이나 안정성이 갖춰져야, 생존은 위협받지 않아야 그 이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경제능력을 아예 무시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단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경제적 능력은 확보하고 아이를 가져야 하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최소한'과 '안정'이 무엇인지가 문제 된다.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집이 없다. 18평짜리 집을 가지면 '최소한의 안정'을 이룬 것일까? 아니다. 18평짜리 집에 살다 보면 '그래도 25평은 되어야...'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결혼이나 출산을 미룬다고 치자. 25평짜리 집을 마련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제 최소한의 안정을 이룬 것일까? 아니다. 이젠 '그래도 방 3개, 화장실 2개는 되어야...'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만족시키면 거기에서 멈출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린 무엇을 얼마나 갖든지 간에 '최소한의 안정'에 대한 기준은 계속 바뀔 것이다. 연간 수십 억을 버는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5-10년 이상 그 정도 연봉 수준을 유지하고 건물 한두 채와 집 한 두 채를 갖고 유지할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안정'이란 기준도 사실 모호하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말하지만 지금 안정적인 직장이 10년 후에도 안정적일까? 지금 가장 안정적인 직장은 공무원인데, 현실적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세금이 줄어들면 20년 후에는 공무원도 해고를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공무원 연금도 수령금액이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공무원도 그런데, 어느 회사에 다니는 게 '안정적'일까? 단기적으로, 지금 당장은 안정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회사생활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건 20-30대는 대부분이 안다. 그리고 회사가 주는 연봉은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완전한 안정을 위해서는 부족하고, 회사원은 회사를 그만두면 치킨집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을 이유로 뭔가를 미루는 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안정과 안정 자체가 중요하지 않단 것은 아니다. 다만, 그걸 기준으로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두 가지는 독립적인 요소로 취급되어야 한단 것이다. 출산을 미루거나 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 중에서 그래도 가장 납득할 수 있는 건 여성의 커리어 문제이고, 난 이 부분은 제도적으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심지어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난 '커리어가, 일이 우리 인생에서 정말 그 정도로 중요한가요? 커리어와 일 끝에 남는 게 뭔가요?'라고 물어보고 싶다. 이 부분은 결혼과 커리어에 대한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이 즈음에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
이 지점에서 우린 '인간은 왜 사는가?'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은 돈을 벌기 위해 사는가? 돈을 왜 버는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곧바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정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위에서 설명했지만 안정은 자신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기준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안정을 삶의 목적으로 두면 평생 돈만 벌다 죽고 말 것이다. 빌 게이츠나 이재용 회장 수준으로 벌지 않아도 자신의 삶이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못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치자. 그것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갈까? 길면 5년에서 10년일 것이다. 사람은 그런 것에 보통은 수개월에서 2-3년 안에 적응을 하고, 한계효용이 낮아지면서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변태적인 유흥이나 오락거리들과 마약은 그런 자극과 쾌락을 좇다가 가게 되는 곳이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리고 나의 행복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껴지고, 깊어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과정에서 행복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통한 행복은 나와 철저히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 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등을 돌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결혼'은 그러한 [나의 편]을 만드는, 두 사람이 서로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이혼할 수 있는데, 이와 달리 항상 나의 편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부모와 자녀일 것이다.
물론, 부모와 자녀도 나의 편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부모에게 엉망으로 대했거나 자녀를 함부로 대했다면 자녀는 물론이고 부모도 나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아이가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자녀가 아무리 개차반처럼 굴어도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더라. 그것이 집착이든, 사랑이든, 인성이 해체된 수준으로 비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는 못한다. 심지어 극악한 범죄자들도 자신의 자녀는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자녀에게서 만큼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어 하며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이 어쩌면 궁극적인 사랑의 경지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부모들은 왜 그럴까? 이는 아마도 아이들이 갖는 순수함의 영향일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순수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에 순진하고 순수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실 세상에서 뒹굴고, 싸우고, 배신당하던 사람들이 유일하게 오롯이 사랑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상은 아이들이다. 이는 아이들은 다른 이유나 이해관계없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에게서 사랑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아이들은 인간세상에서 사랑의 시발점이며, 누구보다 사랑할 줄 아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아이에게서 사랑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진짜 사랑을 알지 못한다.
물론, 우리도 모두 한 때는 아이였고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존재였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은 그런 아이들을 경쟁하도록 하고, 상처를 추고, 다 너를 위해서라면서 채찍질을 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내가 승리하기 위해, 때로는 내가 살기 위해, 때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본래 할 줄 알았던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니, 잊어버린다는 표현보다는 그런 능력이 희석되고 묻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그렇게 잊었던 사랑하는 법을 다시 알고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아이들은 부모를 그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고,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며 따르지 않나? [개념이 없는 애들도 있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말을 듣는 아이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건 대부분의 경우 그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아이들은 없더라. 어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고 예민한 아이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이들이 주변 환경을 어른들과 달리 엄청나게 예민하게 느끼다 보니 어른들에게 있는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그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기르면서 '애새끼가 말을 안 들어'라고 말하는 어른들도 적지 않게 있는데 그건 본인이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주지 않고 아이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부리려 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런 말은 결국 본인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여전히 경쟁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본인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 아이가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어른들은 애들이 말을 못 알아먹는다고 말하지만, 난 주위에서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아이들이 더 본질적인 가치를 중요시하고, 어른스러운 경우를 많이 본다. 아이들을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그저 애로 여기고, 무시하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해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네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그런다'라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맞다. 나도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분명 부족한, 내가 비판한 모습을 종종 보일 것이다. 하지만 또 그런 모습을 보인 후에는 아이에게 사과를 할 것이다. 이는 나는 지금도 내 아이가 아닌 아이들에게도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즉각 미안하다고 하는 편이고, 어른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본인이 아이를 그렇게 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이에게 어떻게 언성을 높이지 않냐고 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다른 성인에게 그 성인이 본인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강요하나? 물론, 그런 어른들도 있다. 그런데 그게 좋아 보이던가? 그걸 좋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적지 않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무조건 아빠니까, 엄마니까 본인 말에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걸까? 그건 본인이 아이보다 우월하고, 우위에 있기 때문에 본인이 옳고, 아이를 자신의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준다면, 아이들은 사실 어른에게 줄 수 있는 게 굉장히 많다. 아니, 어른들은 본인들이 의식주를 아이들에게 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본인 덕을 본다고 착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은 아이들은 그 존재 자체로, 아무 이유 없이 본인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모에게 주는 엄청난 선물을 항상 주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가면 본인이 돈을 왜 버는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생기곤 하는데,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가 명확하다.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아이가 힘들지 않기 위해서. 즉,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의 존재 자체로 삶의 이유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돌보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내가 존재해야 무엇인가를 줄 수 있으니까. 지인들을 보면 그건 부부가 소통을 하고, 서로 시간을 맞춰가면서 상대가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더라.).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주는 것,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면서 처음 느끼고, 그걸 아이와의 관계에서 느낀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더 확장시켜 나간다. 자신만의 것을 챙기기보다 갖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챙길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단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그 사람들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아이가 주는 선물이다. 우리는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 전까지는 무엇인가를 내가 더 갖고, 내가 더 하고,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우리는 같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며, 그래서 변태적인 유흥이나 마약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은, 지속 가능하고 계속 깊어지는 행복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껴질 때 찾아온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대부분이 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갓난아이는 부모의 모든 것을 쏟지 않는 이상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누군가에게 무엇을 줬던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들긴 하지만 처음 경험하는 행복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그로 인해 내 존재 자체가 의미가 있게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그리고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것을 알게 해 준다.
물론, 그걸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인간들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아이의 존재 자체가 귀찮기만 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는 아이를 학대하거나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사람들이 분노하는데서 알 수 있다. 내가 주위에서 본 바로는 아이를 절대 갖고 싶지 않았고 특히 아들은 죽어도 싫다던 사람들도 막상 아이를 낳아서 기르면 아들 바보가 되어 있더라.
다만, 준비되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던 경우, 특히 아이가 생긴 후에도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는 조금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반드시 잠자리를 할 때 피임을 하고, 어쩌면 조금 더 보수적으로는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 잠자리를 해보지도 않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사실 개인적인 경험으로나 주위 사람들 경험을 종합해보나 두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며 스킨십을 하면 꼭 끝까지 가지 않고도 서로를 만족시켜주고 사랑받는단 느낌을 줄 수 있단 것을 확신하기에 그게 불가능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기준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물질적인 기준으로 계산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굉장히 '어른'스러운 생각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질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더 좋은 분유나 기저귀, 영어유치원, 고급 장난감을 갖고 논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너무 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만 아니라면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들보다 부모의 진정한 사랑을 받는 게 훨씬 중요하다. 고급 분유를 먹고, 기저귀를 차고,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 중에 행복하지 않은, 오히려 불행한 애들이 적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여러 남매가 같이 복작이면서 살면서도 즐겁고 행복한 가정도 있단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반드시 행복과 상관관계가 있진 않단 것을 보여준다.
혹자는 '결국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고, 그건 아이를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지도 모른다. 맞다. 자신을 위해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는 건, 내가 아이를 충분히, 제대로 사랑해주면 그건 나를 위해서도 좋지만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런 일을 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를 한 명 낳고 나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낳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 명을 더 낳아야겠단 얘기를 하는 지인들을 보면 과연 아이를 낳는 것이 이기적이기만 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줄 알게 된 그 모습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지고, 그럴 수 있는 게 부럽다.
이효리 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엄마만의 희생과 사랑을 배우고 싶어서' 출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윤여정 씨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서 일하다 보니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말이 아이를 가질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윤여정 씨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한단 거이냐?'라고 묻는다면, 반대로 묻고 싶다. 그래서 아이 없이 혼자 사는 삶은 항상 행복하고 만족스럽냐고. 또 반대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윤여정 씨가 처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없었다면 윤여정 씨가 지금의 윤여정 씨가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사람들이 꿈꾸는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윤여정 씨에게는 아이들의 존재가 그 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아닐까?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 다른 종류의 힘듦, 행복과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점을 감안했을 때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는 경험은 지속 가능한 행복과 사랑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배우면서 경험하게 해 주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힘듦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경험을 하는 게 본인 자신을 위해 더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전에 본인도, 본인의 배우자도 충분히 오픈마인드로, 아이를 최대한 사랑해주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완벽한 부모가 될 수는 없더라. 좋은 부모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듯하다. 본인을 돌아보고,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단 생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 낳아서 기를 수도 있지 않냐고, 왜 배우자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지인들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해도 혼자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 게 분명하더라. 좋은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어떤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지가 그 이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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