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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하는가?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편

by Simon de Cyrene

당신이 교회를 다닌다면 이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난 다시 물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구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협박하는 쪼잔하고 질투심이 많은 모습을 보이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이 정도 질문을 하면 '믿음이 없는 질문하지 마.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은 그냥 믿는 거야.'라는 식의 대답을 한다. 이 얼마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인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이 이 근본적인 질문에도 답을 못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평신도들이 이에 대한 답을 못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목회자가 권위로 찍어 누르면 그냥 맹목적으로 그걸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이에 대한 답을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세상의 쓴맛을 본 적 없이 신학교라는 상아탑에 갇혀서 신학이라는 이론만 공부하고, 교리와 성경에 대한 시험만 보고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평신도들은 성경을 모르고 맹목적인 신앙을 가져서, 목회자들은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을 못한단 것이다.


당신이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면 또 묻고 싶다. '당신은 운명을 믿는가?'라고. 당신이 운명을 믿는데 신은 믿지 않는다면 난 '그 운명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요?'라고 물을 것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운명을 믿는다면 그 이면에 뭔가 다른 게 있단 것을 믿는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을까? '정해진 경로'가 있기 위해서는 그 뒤에 뭔가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 게 없다면 운명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하는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은 점치는 것을 포함하여 불확실한 미래를 알기 위한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묻겠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서 점은 왜 보러 갈까? 점을 치러 가는 것은, 미래에 대해서 뭔가를 알기 위해서 돈까지 쓰면서 노력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어느 정도는 뭔가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결국 '운명'을 의미하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운명을 믿는다면 그 이면에는 뭔가 다른 게, 신 같은 게 있다고 믿는 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만약 당신이 운명도 믿지 않고, 정해진 미래는 절대로 없으며 세상은 다 우연히,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믿는다면 나는 '우주가 [우연히] 이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묻겠다. 이 부분은 내가 이전에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쓴 글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시리즈에서 뒤에서 쓰겠지만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 창조론은 '신이 이 우주 뒤에서 이 우주가 균형을 잡게 주관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 반면 진화론은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진화가 어떻게 이뤄졌나?'에 대한 이론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대립되는 이론이 아니다. 이 두 이론은 병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신론적 진화론자'는 진화를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진화가 일어나도록 이끌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고, '무신론적 진화론자'는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에 의해서 '우연히' 그런 진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여기에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에 '우연'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게 불편할 것임을 안다. 자연에 적응하기 가장 적정한 특징을 가진 것들이 살아남은 것이 어떻게 '우연'이냐면서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런 진화는 수 백억, 수천 억년에 거쳐서 일어난다. 그런데 지구의 환경은 인간이란 악랄한 종자가 환경을 더럽히기 전에는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았다. 지구의 변화는 매우, 매우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에 맞춰서 살아남고 변하는 속도도 매우, 매우 천천히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졌는지는 환경의 변화의 영향을 천천히 받는단 것인데, 만약 A라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지다가 B라는 방향으로 이뤄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C라는 생명체는 A방향으로 이뤄지는 변화에 맞춰서 변하다가 B라는 변화 때문에 퇴보될까? 아니면 C라는 개체 중에 B라는 방향의 개체들이 소수가 되었다가 A방향으로 변할까?


이런 변화는 이론적으로 수일, 수년간에 일어난다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 년에 거쳐서 이런 변화들이 자연의 변화에 맞춰서 일어나 왔다는 것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그렇게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들이 계속 이뤄졌다면 우리는 지금쯤 어떤 변화에도 장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거나 지구가 맞이했던 변화들로 인해 생명체가 대부분 멸종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자, 지구가 A라는 방향으로 바뀌어서 그에 맞는 개체들만 남았는데 B라는 변화가 또 일어나면 그중에 A와 B 모두에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으니 그 개체수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변화가 계속 일어나면. 그에 맞춰서 진화하고 바뀐다고? 어떻게? 무슨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따지고 깊게 들어가다 보면 그 끝에는 결국 어느 시점엔가는 '우연'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이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라고 답한 것은 아인슈타인도 세상의 법칙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진화가 우연히 일어났다면 우리의 감성은, 이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그걸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고 이론은 검증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일 뿐이다.


난 생물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의사도 아니지만 내 몸이 여기저기 아픔으로 인해 내 몸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게 우연히, 어쩌다 이렇게 되었다는 게 맞나 싶다. 위, 대장, 손, 발, 뇌, 눈, 귀, 코, 입... 이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생겼다고? 아니 자연선택이었다면,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서 진화가 이뤄졌다면 우린 먹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먹어도 되게, 최소한 무엇인가를 필요 이상으로 욕구하거나 욕망하지 않게 진화되지 않았을까? 성적인 욕구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수단이라고 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정말 생존을 위해 진화되었다면, 살아남는데 유리한 것들만 남았다면 최소한 탐욕은 없는 게 유리하지 않았을까? 자연선택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비효율적이게 진화한 것일까? 사실 '생존'만 생각하면 단세포로 존재하는 게 가장 유리하다! 자연선택이 사실이라면 인간처럼 감정과 이성까지 있는 비효율적인 인간은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어야 한다.


이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론과 생각은 '신'이라는 존재만 끼워 넣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 의도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신이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고 하면, 이러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어진단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신의 존재는 입증이나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박진영 씨가 본인이 공부를 해보니 신의 존재가 머리로는 믿어지는데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시기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란 것이 말 몇 마디로 논증과 입증을 통해 생길 수 없단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믿음이 없는 것'이라며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합리성과 이성이 강조되지 않던, 사람들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막연하게 이건 이 이면에 있는 대단한 존재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통했겠지만 합리성과 이성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교회가 과거의 그런 모습으로 머물러 있단 것이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예배드리는 방식도, 신학적 이론도 변해 온 것처럼 믿음과 신앙과 신에 대한 논의도 그 시대적인 맥락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사회라고 부르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와는 무관하게 무엇에든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성과 이성은 대부분의 경우 '확률'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는 믿음을 갖도록 만들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 신이 존재할 가능성과 관련해서 계산해 본 내용을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뭐야... 겨우 이제 본론이야?!).


첫 번째로, 우리는 인간의 '성향'을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어떤 성향을 타고난다. 이는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글을 잘 쓰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한다. 그런 것을 유전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만약 자연선택과 같은 이론이 맞으려면 인간은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도, 재능과 성향적인 측면에서도 비슷한 게 정상이다. 이건 '확률적으로' 그렇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그에 가장 잘 적응할 존재들만 살아남았다면 그래야 하니까.


그런데 우리는 모두 엄청 다르고, 세상에는 여전히 약골이 많은 반면 또 모든 사람이 약골은 아니다. 산업화 이전에는 사실 인간의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 죽었기 때문에 자연선택 이론이 맞다면 그 소수의 후손인 인간은 유전적으로 봤을 때 비슷비슷한 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 이럴 '확률'은 얼마나 될까?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출생부터 생각해보자. 우리가 우리 부모와 우리가 처한 환경에 태어나서 우리가 가진 성향을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게 우연이라고 하거나 유전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만약 유전적인 것이라면 형제, 자매는, 아니 쌍둥이들은 모두 완전히 똑같아야 한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일란성쌍둥이도 성향이 다른 경우가 있단 것은 유전적인 부분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면서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살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경우들을 몇 번은 겪게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계기가 그 사람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계산을 해보면,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 살고 있을 확률은, 아니 어쩌면 생존해 있을 확률도 매우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확률적으로' 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나 '운명'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운명'이라 믿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삶 이면에 무엇인가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그 모든 게 그냥 '우연'으로 믿는단 것은 사실 그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과 이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사는 사람이 신이 존재한다고 진짜 믿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특히 인간은 보통 '선함'과 '좋은 것'에 대해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미래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마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삶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신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 신은 없다고 결론지어버리지 말고, 본인이 당장 원하는 일이 본인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그 후에 일어났을 일들을 상상해 보자. 당신의 삶은 100% 행복했을까? 우리가 생각했던, 원했던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 인생은 완벽했을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가 원했던 것을 갖지 못했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신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난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난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간 것을 미친 듯이 후회하면서 첫 차를 기다리며 내가 다니던 회사 사옥 옆 공간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회사를 올려다본 적도 있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변호사시험에 끝내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노력해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잔인한 신은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 그대로 남았다면, 변호사시험에 붙어서 변호사가 되었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알게 된 내 성향을 그 상황에 대입해 보니 나는 회사에 남았으면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겠지만 다른 것들로 인해 또 다른 방식으로 힘들었을 것이고, 변호사가 되었다면 법조계의 갑갑한 문화에 숨 막혀 머리가 빠졌겠더라. 그리고 학부시절 때부터 내 삶을 돌아보면 지금 내 삶의 방식이 (당장 돈을 많이 못 벌어서 그렇지) 내겐 가장 맞고 행복하더라. 이건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수입이 불규칙하고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할 때는 행복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건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죽냐고 말하기도 하는데, 죄송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사람이 다른 상황에 다르게 죽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아닐 것이다. 우린 누가 언제 죽든지 그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묻자. 이 땅에 살아있는 게 무조건 더 좋은 것인가? 당신은 살아있는 게 항상 행복한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인가? 이 질문들에 흔쾌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힘든 면이 있다.그렇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그런 작은 일들로 인해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처사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에 쥐었다고 해보자. 자원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것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그것을 가져야만 하는가?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인가? 다른 사람은 왜 그것을 갖지 못해도 되나? 이런 질문을 해보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발로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그냥 믿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맞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믿음은 사실 작은 일로 인해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무엇인가를 '믿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언제 신뢰하게 되는지, 상대를 신뢰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자.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연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린 연애를 얼마나 하면 상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수 십 년을 산 부부들을 보면 오래 알수록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따라서 나는 '신이 있다'라고 지금 당장, 짧은 시간 안에, 빨리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고 직접 겪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믿지 못하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믿을 수 있겠나?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은 삶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사람들이 신을 믿게 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모두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교회에서 누군가가 묻는 질문에 '의심하지 마라'라던지 '믿음이 작다'거나 '믿음이 없다'라고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나? 아니, 아는 게 없는데 믿음이 작거나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뭘 얼마나 알까? 그렇게 아는 게 맞는데 왜 그런 질문에는 아무 답도 주지 못하는 걸까?


믿음이 그렇게 맹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다. 하물며 이성과 합리성이 중시되지 않는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는데 한계를 느끼거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성과 합리성이 강조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는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설명이 된 오늘날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믿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험과 이성과 합리성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의심도, 고민도 없이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 패턴을 보면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 신이 어떤지는 알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으면서 믿는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게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과 현실에서 한국 교회를 욕 먹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이다. 행동은 엉망으로 하고 온갖 거룩한 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 서두에서 내가 했던 질문을 던져보면, 그들 중에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신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리고 개신교만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에 다른 종교들에 곁눈질도 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 의심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내 믿음은 내가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내가 그런 상황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돌아보면서 내 인생이 [확률적으로] 그렇게 흘러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가고, 여러 종교의 교리를 들여다 보고 특히 성경을 읽으며 그 내용이 갖는 의미와 그 내용에 대해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단단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읽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신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 믿어지지 않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당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일 확률이 얼마일지를 따져 보라'라고 제안하고 싶다. 그 과정을 몇 달, 몇 년씩 하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그런 흐름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확률이 너무 낮단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해서 기독교나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이라고 불리는 절대적인 존재나 법칙이 있단 것을 믿는다면, 그때부터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고민이 필요하다. 신이 있다면, 뭔가 알 수 없는 원리나 법칙, 패턴이 있다면 인간이 지금과 같은 모습인 것에서도 이유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도 이유가 있을 테니까.


자신이 어떤 종교를 믿을지는 그다음에 완전히 결정해도 된다. 따라서 일단 신의 존재 자체를 믿게 되었다면, 나는 자신이 그 시점에서 믿어지는 종교를 믿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는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그래도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선택한 후에도 그런 고민은 끊임없이 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 [진리]에 가까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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