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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논할 자격에 대하여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편

by Simon de Cyrene

앞의 글에서도 썼지만, 이 시리즈는 구독자 잃을 것을 각오하고 쓰는 시리즈다. 공을 들여 쓸 생각이기 때문에 많아야 주 1회, 평균적으로 월 2회 정도밖에 쓰지 못하겠지만 꽤나 지루하고 진지한 내용을, 그것도 2020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9.7% 밖에 (사실 이 통계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 생각보다 많아서.) 안 되는 시점에 기독교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인기나 조회수의 차원에서는 미친 짓이니까. 가벼운 콘텐츠들이 대세가 된 시대에, 교회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에 이런 시리즈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보면 나도 제정신이 아니고 자신만의 세계가 어쩌면 과도하게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구독자를 잃을 각오로 이 시리즈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후 문득 궁금해졌다. 이 시리즈 때문에 구독자를 잃는다면, 내가 잃는 구독자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까? 아니면 교회를 혐오하거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을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교회 다니는, 부모님께서 교회에서 만났기에 유아세례를 받아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제사를 드리는 삶이 상상도 안 되는, 부끄럽게도 제사상이 어떤지를 이 나이 먹도록 모르는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는 전자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왜냐고? 이는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종교나 예수님, 하나님에 대한 얘기는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목사님 말을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고, 목사님이 전도해서 사람을 늘리는 부흥을 시켜야 한다고 하면 열심히 생계를 포기하고서라도 길에서 전도편지나 주보를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삶. 그게 한국에서 교회 다니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이다 (가끔씩 전도편지나 주보에 휴지나 사탕도 같이 주는 교회들도 있던데 그런 걸 보면 이게 선전지를 돌리는 건지 기독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학을 정통으로 대학에서 공부도 하지 않고, 심지어 집사나 장로 안수도 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를 다닌답시고 기독교에 대한 글을, 그것도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으로, 성경 얘기까지 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동으로 여기고, 그에 따라 내가 이상하고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구독을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이게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그런 지위를 갖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시스템... 뭔가 과거에 있었던 것 같지 않나? 개신교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게도 아니고 조금만 있다면, [종교개혁]이란 얘기만 들어본 적이 있고 '면죄부'가 언제 처음 생겼는지만 알아도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느 시기의 교회와 비슷한 지를 알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들의 그러한 문화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기의 구교, 천주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면죄부는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가 부패한 생활 때문에 재정적으로 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시점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서 상자에 돈을 넣고 여혼을 지옥의 불길에서 튀어나오게 하라고 했던 '명부'를 칭하는 말이다. 그런 면죄부와 '헌금은 반드시 교회에 해야만 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건축하는데 헌금을 해야 한다'는 말이 그 본질에 있어서 얼마나 다를까? 대놓고 천박하게 팔지 않아서 그렇지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드려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시작이었던 시기에 개혁의 대상이었던 구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인 내가 봐도 그 이후 구교(천주교)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서 더 깨끗하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런 얘기는 이 시리즈에서 조금 더 깊게,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이니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교회 문화가 개신교와 구교를 모두 포함하는 '기독교'의 정통 또는 전통인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기독교의 기본이나 기초에 해당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이나 기초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시작점인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이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들의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예수님은 '교회'를 만들고 건물을 지으셨나?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이후 제자들은? 지금은 '기독교'로 분류되는 종교의 시작점이 되는 교회와 그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사실 그 시기만 하더라도 '유대교'를 뿌리에 둔 하나의 종파, 특히 유대교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이단적인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핍박을 받았고, 살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지하교회로 들어가야 했다. 그 당시에 무슨 목회자가 있고, 교회 건물이 있었겠나? 그 시기에 목회자도, 교회 건물도 없었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교회의 본질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신학교'와 '교회'라는 틀은 언제 생겼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 현장의 실습'까지 포함하는 개념의 '목회자 교육'으로서의 신학은 16세기의 종교개혁 때부터 씨앗이 뿌려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신학'은 극소수의 종교인들을 교육하는 영역이었지 대중에 대한 교육이나 목회의 개념이 아니었다. 하물며 13-14세기까지만 해도 사제나 주교들 중에서 문맹인 사람들도 수두룩 했는데 일반 성도들에 대한 목회에 대한 개념이 생길 수가 있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라는 개념과 평신도들의 '성경공부'와 같은 개념,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18세기의 경건주의와 근대 대학의 발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당히 근대적인 개념이다.


근대적인 대학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관을 믿고, 그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은 신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고 '신앙'을 가졌을까? 그전까지 신학교육이나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핍박받던 시절에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걸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근대적인 교회가 생겨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유토론'을 하면서 신학적인 논의를 해왔고, 근대적인 대학이 생기기 전의 신학교육은 약자였던 예수님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걸러내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 왔다.


이처럼 예수라는 존재를 기점으로, 예수가 신이 보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그가 말한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살며 그가 말한 신이 이 세상에서 일하는 방식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권위를 주고, 그 사람이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고 그에 복종하며 살지 않았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서 그런 존재는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이다. 천주교에서는 '성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나더 레벨'의 사람들로 추앙하지만 개신교는 그보다 훨씬 평등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 개신교의 가장 기본 중 기본은 [만인제사장설]이다. 만인제사장설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고, 제사장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엄연히 말하면 개신교적인 관점에서는 누구든지 성경에 대해서 묻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이단이었던 예수를 따르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의 다른 '종교'를 형성하고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토론과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본질로 돌아갔을 때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묻고, 토론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리즈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지만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상당수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자유'와 '평등'도 그 뿌리는 사실 개신교적인 신앙에 있을 정도로 '자유'와 '평등'은 개신교 교회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내가 이 시리즈를 쓰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읽고 나서도 짜증이 나거나 동의하지 못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과 기독교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지를 설득해 낼 수 있는 예시를 하나 들고자 한다.


'원죄'라는 말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모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당연히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개념이고, 이는 아담의 타락에 의해 전 인류가 신으로부터 이반 되고 그 때문에 죄악의 경향을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4-5세기 기독교 교부에 의해서 확립된 이론이다. 잠깐, '이론'이라고? 그렇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원죄'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그렇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해 왔고 신학자들마다 '원죄'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죄'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죄'라는 개념에 반기를 들려는 것은 아니다. '원죄'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원리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간은 그러한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주고 있으며, 그것을 '원죄'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표현이나 개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어떤 내용이 왜 있는지도 고민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짚어주고 싶었다.


이 시리즈는 기존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중 상당수를 부숴나가는 과정이 될 예정이다. 그 내용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파격이라고 받아들일 부분들이지만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맥락으로는 말이 되네' 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는 정도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내용을 두고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쓸 글들은 내가 생각하는 성경의 내용, 신과 예수에 대한 관점들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결부시키며 '아, 그런 맥락이 있었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교회 틀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파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최근 조사 결과에 의하면 20대의 78% 정도가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고,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종교에 관심이 없을까? 그건 2014년에 63%가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준다고 여긴 반면 2021년에는 38%만 그렇게 생각했다는데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종교를 갖는 것이 자신의 삶과 상관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종교를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시리즈가 엄청난 파급력을 갖거나 신을 믿지 않던 사람이 신을 믿게 만들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걸 목적으로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시리즈를 쓰는 가장 큰 목적은 내가 왜 신의 존재를 믿고, 왜 그게 현실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밝히기 위함이다. 이 시리즈를 읽으신 분들에게 내 글이 말이 안 되지만 않는다면, 그분들이 어떤 종교로든 종교와 신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할 것 같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교회적인 분류에 의해서는 '겨우 평신도'인 내가 기독교와 신학적인 시리즈를 쓰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였다. 본 내용은 다음 글부터 시작된다. 서론이 참 길었다.


*참조문헌

후스토 곤잘레스, "신학 교육의 역사", 부흥과개혁사, 2019

박영호,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IVP, 2021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1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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