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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3편

by Simon de Cyrene

나는 신학이나 종교학을 연구한답시고 그에 대한 의견을 크게 내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절에 나 역시 일부 학문으로서 신학적인 책을 일부 읽었던 적도 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책들을 덮어버렸다. 이는 그 책들이 너무 관념적인 얘기만 늘어놓고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신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힘든 추상적인 고민까지 해야 하도록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고, 진리는 단순할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신학과 종교학을 좋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식의 학문은 필연적으로 불가지론으로, 거기에서 다원론과 해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신을 볼 수 있나?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명확한 근거를 갖고 '신은 이런 존재다'라고 입증하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과 종교학은 끝까지 가면 불가지론자나 어떤 길로 가든 크게 상관없단 결론을 내리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이렇게 간단한 걸 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연구하는지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한 신학과 종교학이 그나마 의미가 있는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삶의 방식/방향을 추구한다'는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게 아닐까 싶다. 이것도 사실은 해체주의적인 관점에 가깝긴 하지만 이것이 그나마 의미가 있는 것은 모든 종교가 삶의 방식과 방향에 있어서 비슷한 모습을 추구한다면 이는 인간에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똑같냐? 다 다르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맞다. 인간은 분명 다르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도, 이란성쌍둥이도 완전히 똑같진 않다. 그런데 인간은 공통점도 많이 갖고 있다. 일단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도 비슷한 면들이 있고,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심리와 정신적인 영역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세계 곳곳에서 접점도 없던 종교들이, 종교인들이 수 천년에 거쳐서 수행하고,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궁극적인 지향점을 비슷하게 그렸단 것은 인간은 공유하는 특징이 있단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처럼 인간이라는 종자가 공유하는 게 많다는 것은 인간은 결국 한 뿌리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전 세계에 인간만큼 곳곳에 퍼져서 살고 있는 생명체가 있나? 없다. 다른 생명체들은 모두 기후와 환경에 따라 서식지가 제한되어 있고 서식지를 옮기면 적응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유독 인간만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인간은 각 지역에서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고, 살아온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생물학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런 부분은 분명 진화 혹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수만 년 이상 다른 곳에 퍼져 살았던 인간이 어떻게 특정 백신을 맞으면 모두 항체를 형성할 정도의 생물학적 유사성을 갖는 지도 신기하지 않나? 순수한 무신론적 진화론이 맞으려면 인간은 서식하는(?) 환경에 맞게 진화해서 모두 다른 유전학적 특징을 갖는 게 정상인데 인간은 전 세계에 퍼져 살면서도 같은 약을 먹고, 같은 백신을 맞으면 개인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같은 효과가 있을 정도로 같은 생물학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인간이 심리적, 정신적으로 비슷한 면이 많다는 면도 굉장히 놀랍고 이상한 일이다. 순수한 진화론적 관점이 맞다면 인간은 사는 지역에 따라 감정적, 이성적, 심리적인 특징들에서도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여야 하는데 인간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유사한 면들이 많아서 (디테일들에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가 아시아에, 아시아에서 이뤄진 연구가 미국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경우가 많다. 거기다 지역과 문화적 배경에서 생긴 종교들이 제시한 궁극적인 삶의 경지나 모습까지 비슷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인간은 같은 뿌리에서 왔다고 추론하는 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리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이 세상을 만든 존재로 전제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가 만든 이 세상, 특히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이성이 발달해 있는 인간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인 삶의 방향에 대해서는 완전히 같진 않아도 비슷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어느 종교도 인간관과 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일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교는 이상향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결론짓고 있으나,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신학과 종교학은 '어디로 가든지 통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주장하는데,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면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종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데도 정답이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과 종교학은 왜 지금까지 그 끝에 해체주의나 다원주의적인 결론을 내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까? 그건 그 안에 사람에 대한 이해, 인문학적인 관점과 요소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현대사회에서 모든 학문의 폐해인데, 근대화가 이뤄지고 모든 영역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왔고, 그로 인해 현실과 괴리된 이론들도 여러 인문. 사회과학에서 나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사람에 대한 이해 없는 사회학이 가능한가? 사회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행정은? 행정 없는 정치는? 그런 요소들이 상호 간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인가? 아니다. 사람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기 때문에 사회학은 현실성이 있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관점을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하고, 정치와 행정은 결국 사회가 국가의 형태로 진화,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문학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모두 고려하고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각 분야의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분야도 소화하기가 버거워졌고, 그러면서 다른 학문과 단절된 연구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러한 연구들의 한계가 또 발견되었고, 그러자 학자들은 원래 하나였던 것을 잘랐다가 다시 붙이면서 거기에 그럴듯하게 '융합학문'이나 '학문 간의 교류'라는 표현을 붙였다.


신학과 종교학에서 해체주의와 다원론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실과 사람을 배제하고 오롯이 종교들의 교리와 가르침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론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론들은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현실성을 갖지도, 진리를 반영하기도 힘들다. 이는 그런 이론들은 인간의 극단적인 사고 실험 끝에 나온 말 그대로 [이론] 일뿐이기 때문이고, 더군다나 신을 연구한다는 신학은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을 만든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반면 우린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없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일 텐데 신학과 종교학은 이 부분을 건너뛰고 있다.


과거에는 이론 연구를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이뤄지지 못했고, 종교계의 힘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주장과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이해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학과 종교학이 '근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 이뤄진 실증적인 연구, 통계들을 검토하여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분석하고 그에 기반해서 각 종교의 인간관을 해석하면 어느 종교의 인간관이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도출할 수 있을 텐데 신학과 종교학의 영역에서 그런 노력을 하는 모습은, 최소한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내용에선 보이지 않는다. 방구석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만 한 학자들의 '썰'만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우선 인간이 공유하는 '그 무엇'에 대해 설명한 후, 그러한 인간관에 비춰봤을 때 각 종교의 인간관은 어떠한지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인간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은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한데, 이는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가족에게는 사랑받고 싶어 하고, 혼자 고립되어 살면서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이 우울해지고 그에 따른 생물학적인 질병까지 생긴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고,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심리적, 생물학적으로 타격을 입는단 것은 인간은 누군가에게는 오롯이 사랑받을 때 가장 건강하단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진리'인 종교의 핵심은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또 그만큼 추상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추상성을 조금은 제거하려면 우린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가장 많이 접하는 이론인 성악설, 성선설, 성무 선악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이론들은 말 그대로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악한지, 선한지, 어떤 성향도 타고나지 않는지에 대한 주장들인데, 모든 종교는 이에 대해서 조금씩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교가 '진리'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들을 살펴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성선설'을 믿는다. 이는 만약 '성악설'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선해질 유인이 없는데 모든 사람 안에는, 심지어 극악해 보이는 살인자 안에도 일정 영역에서는 선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인간이 만약 타고나게 악하다면 어떤 순간들에, 왜 선한 모습이나 마음을 가질까? 그럴 수 있는 시나리오 자체가 없다. 성무 선악설의 경우에도 극악한 사람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만큼은 선하고, 그들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점에는 극악한 사람들도 과거로 추적해 들어가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떠한 계기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되었단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현실에서 마주한 여러 상황들로 인해 극악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는 그 악함이 우선적으로 내재되어있었던 것은 아니란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선함을 타고났다면 왜 악한 모습을 갖게 될까? 그건 이 땅에서의 삶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에 대한 책, 영상, 이론들이 많이 나왔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아기를 갖기 전에는 그런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게 많이 알려진 지금도 적지 않은 부모들은 부모가 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기들은 이 세상에 선함만 가지고 태어나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선 성숙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삶을 시작한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로 인해서 말이다. 아기들은 특히나 경험치가 낮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일들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고, 연구결과들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 성장환경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는단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로 가면 성장환경에서 거칠어진 아이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성향을 그대로 받거나 그로 인해 망가지면서 '악함'이 그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타고난 모습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경쟁적이고, 그에 따라 본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본인도 악해져야 한단 생각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으로 변한다.


내가 성선설이 맞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챙기라고,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엄청나게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아를 갖고 잘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힘듦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한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렇게 선함을 베풀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과 평안은 돈을 많이 벌어서 누리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또 오랫동안 지속된다.


인간이 악하거나 백지처럼 태어난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인간의 특성은 과거에 통계나 기록들이 누적되지 않아서 분명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인간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지고 인간의 경험들이 다양한 매체로 전파되는 우리 시대에는 조금만 멈춰서 깊게 고민을 해보면 이러한 사실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이 각박하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을 할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고민은 사실 앉아서 공부하면서 월급을 받는 학자들이 해야 하는데, 학자들은 그런 본질적인 공부와 지경을 넓히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 명예와 권력을 쥐는데 관심을 갖거나 본인 분야만 들여다보면서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다 보니 그런 분석과 연구들이 많이 이뤄지지 못해 왔다. 아니, 이뤄졌다고 해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선하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느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이와 같은 논쟁은 근본, 기초를 탐구하는 데는 의미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큰 차이를 구현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제는 기억도 잘 못하는 아기 때부터 환경과 사람의 영향을 받고,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경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고나게 선하다고 하더라도 그 선함은 사후적으로 체득하는 악함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때로는 그 악함이 선함을 가릴 정도로 망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구분에 현실에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차도 사고를 여러 번 겪으면 망가지듯, 사람도 치열한 현실에서 치이고 다치다 보면 망가질 수밖에 없단 것이다.


다만, 그런 구분이 현실에서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는 법제도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는 인간이 선하다면 우린 사람의 교화를 중심으로 법제도를 구성하게 될 것이고, 인간이 악하다면 처벌하는 것을 중심으로 법제도를 구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는 무의식 중에 '인간은 악하다'는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고,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다 시기도 하다. 하지만 진리는,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의 주장은 당시에 극소수설에 그쳤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가 옳았단 것을 알지 않나?


기독교에 대한 나의 주장은, 이런 인간관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살펴보기 전에 다음 글에서 다른 종교들은 어떤 인간관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1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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