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5편
이 글의 실질적인 제목, 그리고 이 글에서 결론지을 내용은 '기독교란 무엇인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하여'라고 지은 것은 기독교적 인간관을 이해하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명시적으로 '신'을 전제로 한다. 영어 성경에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은 대문자를 사용해서 God으로 표기하고, 다른 이방인들이 믿는 신들은 소문자로 gods라고 표시하는 것은 기독교가 분명한 '신관'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그런 신(God)이 어떤 존재인지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의 성경을 '신에 대한 설명'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성경은 '인간에 대한 설명서'이고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신약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는 '종교'임에 분명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way of life)을 보여주는 책이지 단순히 신에 대한 설명문이 아니란 것이다.
성경에서는 시작부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대부분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온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내용도 있다. 하지만 창세기는 어디까지나 문학적 성격을 갖고 있는 문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내용을 과학책이나 설명문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창세기는 그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이 갖는 함의가 더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성대로' 만드셨단 것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후에 선악과를 먹은 후 선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그 후에 '악함(sin)'이 들어왔단 의미를 갖는다. 이전 글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난 모든 인간이 선함과 악함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성선설과 성악설의 구분이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두 관점은 '악한 인간도 교화되고 선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두 입장이 분명히 차이가 있고, 인간이 타고나게 악하다면 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성선설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 비춰봤을 때 성경은 어떤 종교의 경전보다 인간의 본성을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모델로 해서 인간의 그러한 본성이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는지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해석을 유대인들인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고 해석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라고 여기지만, 나는 여기에서의 '선택'은 우열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으로, 일종의 샘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라고 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더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굉장히 잘못된 선민의식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모든 인간은 신의 창조물인데 도대체 왜 유대인들과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다르게 분류된단 말인가? '민족'이란 분류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모든 인간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더 우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우매한 생각에 불과하다. 이런 내용들은 이 시리즈 후반에서 다루도록 하자.
개신교와 천주교는 사실 이 지점에서 갈라지게 된다. 천주교의 경우 '성인'을 지정해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들로 삼고, 고해성사처럼 인간이 신과 직접 소통하기보다는 누군가를 통로로 삼아 소통하는 경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와 달리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신과 인간은 기도를 통해 직접 소통을 하고, 목회자들은 공동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적 지위'적인 면에서는 더 진보적인 것이다. 실제로, 현실적으로 그렇단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한단 것이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시리즈 후반에 교회의 현실들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구약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굉장히 이기적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게 도대체 왜 한 종교의 경전인가?' 싶을 정도로 찌질한 사람들의 향연이 특히 구약에서 펼쳐진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아브라함은 사실 그렇게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살고 싶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로 말하고,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기도 한다. 야곱은 누구보다 얍삽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보다는 형이 자신을 죽일까 싶어 두려워 안전장치들을 마련해 놓는다.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빼낸 모세는 자신의 성질을 못 이기고 분노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라는 다윗은 여자를 갖기 위해 부하 장수를 전쟁터에서 죽음으로 내몰았다.
구약성경에는 이처럼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고 실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나 가득 실려있다. 그것도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디테일들까지 심어놓으면서. 사실 그런 개인들도 개인이지만, 구약 전체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반복적으로 잊어버리고, 자신들 멋대로 살면서 엇나간 유대인들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자신들의 조상에게 한 신의 약속을 기억해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마무리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내용을 모은 책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인들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구약의 이야기는 '경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욕심, 욕구, 욕망들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이고, 어디까지 엇나갈 수 있는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인지를 구약은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는 엇나갈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그려내고, 큰 틀에서 유대민족이 움직이는 방향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다. 그 시작이 창조에 대한 것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는 선함이, 신을 닮은 기본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사실 기독교는 불교와 비슷한 면이 분명히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과 불교의 '불성'은 인간 안에는 기본적으로 선함이, 가능성이 있단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불교에서는 그걸 인간의 노력으로 살려내고,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구약성경의 내용을 통해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렇게나 끔찍하게 될 존재이고, 그걸 바꾸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을 만든 신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구약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삼라만상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때로는 달래면서, 때로는 혼내고 협박하면서 유대민족을 끌고 가는 신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구약이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면, 신약은 무엇을 어떻게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직설적인 가르침이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진다. 사람들은 '메시아'라고 하면 뭔가 신비주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메시아'는 '기름 부은 자'를 의미하는 표현이고 히브리어 성경에서 메시아는 성직자, 왕, 예언자 등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39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뭔가 신비적인 존재로 해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쩌면 '신의 기름부음 받은, 인간에게 살아야 할 방향과 길을 보여주는 자'로 해석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 지극히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것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니는 사람들도 흔히 하는 착각 중에 하나는 성경에서 사후세계에 대해 뭔가 명확하고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천국을 얘기하면서 이 땅에서 덕을 쌓고 가야 하는 식으로, 본인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얘기를 매우, 극히, 제한적으로 그것도 추상적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죽은 이후에 누가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을지를 두고 싸우는 제자들을 야단치셨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이 땅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야 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창조된 모습으로의 회복'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천국'에 간다는 내용도 사람들도 사후세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사람들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사후세계는 물론이고 현실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천국에 간다는 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창조된, 만들어진 모습을 찾아서 그에 따라 삶을 살아낼 때 이 땅에서 신이 만든 아름다운 질서가 회복된단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것이다.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이는 매우 단순화시키고, 추상적으로 자기계발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 결국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 중요한 것,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성향, 재능에 따라 살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가 된다. 결국 '너 자신을 알고, 네가 타고난 대로 살아라'라는 뜻이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네가 타고난 것'은 신이 우리를 만들 때 우리 안에 심어놓은 것들을 의미하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자신 안에 심겨진 것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키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아무리 권력, 돈, 명예를 추구하라고 꼬셔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을 살아내란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이런 걸 마치 전쟁터에서 나가 살듯이 치열하게, 일처럼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라고 가르친 것은, 그렇게 살 때야 비로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힘든 게 있을 것이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구약에 나와있는 것처럼 사람은 온갖 욕망, 욕구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람들이 유혹하고, 좌절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고 해서 삶이 항상 행복으로만 가득 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담보해 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는 이처럼 분명 그 뿌리를 같이 하는 유대교,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신의 계획'을 전제로 하고는 있다. 하지만 유대교와 달리 구약 이후에 신약의 내용이 있고, 이슬람교에 있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없다 보니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관통하는 인간관과 신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에서는 신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데 있다. 신은 심어놓은 계획은 있지만, 그걸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살아내기를 바라며, 그렇지 않더라도 용서하고 품어주는 존재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고, 신의 도움을 통해서만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극악무도하단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함 또는 신성이 있고, 인간에게는 언제든지 다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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