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6편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공감을 하는 편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비판에 대해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니고 일부 교회만 이상한 것인데 억울하다'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주장은 그리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성경에서는 모든 교회를 한 몸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직접 잘못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런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고, 본인이라도 사과하는 게 '성경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억울하다고? 아무 잘못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는다면서 그 정도 억울함은 감당하고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 '소수'의 교회들만 그런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교회나 기독교 계열의 단체들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가? 정말 '소수'만 이상할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요하고, 자신은 천국에 가는데 상대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 안타깝다는 말을 입 밖에 내서 하고, 술이나 담배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죄인 취급하는 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소수'일까?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배경에는 그런 한국 교회의 문화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 교회 중 상당수가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은 공감을 하면서도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난에는 화가 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자신들 멋대로 적용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후반에서 다룰 예정이니 우선은 여기까지만 하자.
개인적으로는 비판하고, 잘못된 것들을 짚어내는 것보다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고,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성경무오설'을 믿는다. 이는 성경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고 믿는단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믿음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 이야기에서 '하루'가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이라고 믿는 것인데, 사실 '하루'라는 것은 인간이 구분 지어 놓은 것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문학적 성격을 갖는 창세기에서의 '하루'가 그 '하루'를 의미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무엇보다 창세기는 기원전 55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에 그나마 존재하는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 뿐이었고, 유대인들 대부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관념조차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이 쓴 '하루'가 '24시간 이내'를 의미할 수는 없다.
정말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성령의 감동으로)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 것도 완벽하게 쓰여졌다'는 신비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실 대놓고 이렇게 생각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시선이 잘못되었다는 건 수많은 성경학자들이 이미 밝혀냈다.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밝혀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성경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내용을 재구성하면 상호 간에 모순되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학문적으로 입증이 되었다. 만약 성경이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마치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쓰여졌다면 그런 모순되는 양립 불가능한 내용들이, 인간도 짚어낼 수 있는 허점들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순들을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짚어내고 있다. 이게 팩트다.
이에 대한 가장 온순한 대처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원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은 다른 시기에, 그것도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졌는데 그걸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성경 원문에는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조차도 대부분이 이처럼 번역본들에 있는 오류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왜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의 언어에 모순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그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 번 성경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우선 우리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독교'라고 불릴 수 있는 교파들이 개신교와 가톨릭 외에도 그리스, 슬라브, 조지아, 시리아, 콥트,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다양한 교파가 있고 교파들에 따라 '정경' 또는 '성경'으로 인정하는 책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신교는 모든 기독교 교파들 중에 가장 보수적으로, 적은 숫자의 책들을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모든 기독교 교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경만 인정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책처럼 쓰여진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시기에 쓰인 문서들을 취합해 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중에 예수가 오기 전의 내용인 구약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쓰여진 문서들로 주로 히브리어, 일부는 아람어로 쓰여졌으며 39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인 문서를 직역한 버전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되어있는 구약성경을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기원전 280년에서 150년 사이에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을 다시 번역한 것이고,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그대로 번역한 성경들은 특별히 따로 발행된다. 이 칠십인역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도 사용되었고, 예수님께서 인용한 성경도 칠십인역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1세기 후반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쓴 27권의 책과 편지로 구성되었으며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정경'인 성경은 어떻게 이런 구조를 갖게 되었을까? 구약성경의 경우 1세기에 얌니아(Jamnia)라는 지역에서 당시 유대 랍비들이 종교회의에서 39개의 문서를 정경으로 확정한 것인데 천주교의 경우 1548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구약성경 목록을 46권으로 확정해서 개신교에서는 정경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문서들이 천주교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신교의 신구약을 모두 합해서 66권은 379년인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확정되게 된다.
이 외에도 '예수'를 중심에 둔 '기독교' 교파들과 성경에 대한 문헌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성서학적인 이론들이 제시된다. 특히 번역본들의 신뢰성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정말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칠십인역의 번역, 그리고 그 칠십인역을 다시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지점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처럼 성경은 그 배경과 구성 과정 등을 보면 논란도, 불확실성도 많은 책이다. 한국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성경은 이처럼 논란이 많은 속에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고, 한국어로 된 성경들도 다른 번역본을 보면 미묘한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들이 있는 게 현실이다. 영어 성경들도 다른 버전을 보면 이러한 차이들이 도드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은 절대적이고, 아무 모순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켜서 이 땅에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하기도 했고, 사후에 예수님 오른쪽에 누가 앉을지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라를 건설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다. 성경이 뭔가 신비적인 힘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완전히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뭔가 신비한 힘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 정복할 것을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다. 성경에 그런 신비스러움이 담겨있기를 기대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이 그런 존재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간 광야에서 돌리고, 성경의 인물들이 실수하고 넘어지고 빈틈을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것, 완전무결한 것이 중요했다면.
성경에서 신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으로 부르는 절대자는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안에 있는 '창조된 모습에서 벗어난 상태'로 지내는 것을 허용하고, 그 와중에 자유의지도 허락한다. 인간의 실수와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그대로 두신단 것이다.
앞의 글에서 설명했지만 성경의 내용은 그 맥락과 메시지를 보지 않으면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막 나가고 제멋대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완전한 인간과 신이 그런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이 전제하는 신은 그러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고 보는 존재다.
그런 맥락에서 성경의 내용에 있는 오류 혹은 모순들은 사실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아니, 나는 사실 그런 불완전성이 오히려 기독교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만들었다면 인위적으로 그런 모순들을 바로 잡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은 일부의 주장처럼 설화, 신화나 소설일까? 아니다. 이는 성경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족보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설화나 신화들 중에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수대에 걸친 족보를 쓰고 있는 경우가 있나? 없다. 만약 성경의 내용이 그저 설화나 신화라면, 인쇄술이 발달되어있지도 않은 그 시기에, 이야기가 부각되지도 않는 이름만 있는 문헌을 그렇게나 정성스럽게 만들 이유가 없다. 아니, 오늘날에도 드라마 하나를 만들 때 가장 힘들고, 귀찮고, 짜증 나는 일들 중 하나가 사람 이름 짓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의 이름들을 빌려다 쓰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곳곳에서 족보가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노력을 들여서 인위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할 이유가 없다.
성경의 핵심은 구체적인 디테일들이 아니라 큰 흐름과 그 안에 심겨진 메시지다.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과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 초점은 그 지점에 맞춰져야 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지 않나?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싸웠다고 치자. 그리고 두 사람이 일기장에 그 사건에 대해 썼다면,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내용을 쓸까? 아닐 것이다. 이는 글을 쓸 때는 개인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경의 문서들이 쓰여진 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합리적, 객관적,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인정되던 시기다. 아니, 그렇게 사고하기 위해 노력한 극소수의 사람들의 글들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편협하고, 한쪽으로 경도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노예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던 사람들도 많은데, 그게 오늘날의 기준으로 합리적이, 이성적이고, 평등한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반인권적이거나 비인간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았던 환경에서는 그게 자신들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의 내용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특성 등을 고려하면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일면 오류로 보이는 것들도 그런 맥락에서 인터넷은 커녕 책에 대한 접근 가능성도 거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쓴 기록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환경과 시대적 상황을 전제하고 성경의 내용을 읽으면 그 내용이 단순히 인간의 생각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세계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습과 배치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비춰봐도 놀라운 수준의 평등과 인권과 정의에 대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이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주관이 반영된 문헌이라는 것을 전제로 읽고 해석하면 그 내용에 감탄하지 않기가 힘든 면들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이 내린 의사결정들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인 것들도 많다. 그 내용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이 만들어진, 개신교의 성경의 경우 66개의 문서가 하나의 책으로 엮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결국 사람들이 의사결정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데 성경에 나온 신은,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반대로 만약 신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가짜라면, 다른 신이 있다면 왜 성경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읽히는 책이 되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왜 여전히 수많은 콘텐츠들이 성경의 내용에서 파생되어 나오게 되었는지도. 성경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영화나 드라마들 중 세계관을 다루는 작품이나 시리즈들은 그 기초를 여전히 성경에 두고 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예정이기도 하고, 이 내용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니 일단은 여기까지.
성경은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문서가 될 수 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성경을 공부하다 무신론자가 된 성경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건 그들이 성경이 갖고 있는 특성에 대한 오해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자신이 생각하는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니 자신의 관점을 의심하기보단 그렇게 돌아서 버리는 것은 마치 과메기를 생으로 먹지 않고 김에 싸 먹으면 다른 맛이 느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으로 한 번 먹고 비리고 질기다고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먹어 본 과메기가 맛이 없었다고 해서 과메기가 다 맛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성경이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성경은 간단한 문서가 아니다. 성경의 내용이 놀랍게 다가오고, 그 안에 담겨있는 세계관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고, 고민도 해 봐야 한다. 그렇게 현실과 성경의 내용 사이를 오가다 보면, 특히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사회상을 공부하고 상상하면서 보다 보면 그 안의 내용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그리고 그 시대에 인간의 지혜로 쓸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는 그게 나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루 아침에 믿어질 수 없단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몸과 삶 하나도 간수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내가 개신교 신자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성경을 매일, 최대한 손에서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종교적 의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 현실과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사점들을 많이 주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게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진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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