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4편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는 문화적으로는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이라고 정의되기도 하고 신(God)적인 관점에서는 '무한·절대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직접 접하는 것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믿음체계를 의미하고 그중에 상당수는 초월자인 '신'을 전제로 한다.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종교는 '현생 이면에 어떤 원리나 초월적 세계가 있다고 믿는 다양한 시각'으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결국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 관점은 '다른 것'이지 어떤 것이 옳거나 틀리다고 할 수는 없게 된다.
과연 그럴까? 어떤 신이 존재하는지, 또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어떤 존재인지는 입증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종교를 신과 초월적인 세계만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건 모든 종교가 특정한 인간상을 전제로 하고, 그 종교만의 인간관을 갖고 있단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가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인지 여부는 최소한 그 종교가 갖는 인간관을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샤머니즘
우선 샤머니즘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 보자. 샤머니즘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왜 모든 샤머니즘을 하나의 종교 행태로 묶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샤머니즘을 하나로 묶는 것은 샤머니즘은 그 숭배 대상이나 방법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의 행복과 성공'이다.
샤머니즘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어떤 물질이나 대상에 신이 있다고 믿고 그 대상에게 자신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형태의 종교활동이다. 이러한 샤머니즘은 어떤 인간관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본인들이 정성을 다하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의 정성을 보고 행복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신에게 행복을 빌면,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없다. 이는 현실에서는 모든 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원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제한되어있다. 대학 입학정원, 선호되는 대기업 신입사원 숫자, 대박 날 주식의 숫자. 무엇이든지 좋다. 생각해보면 제한되어 있지 않은 자원이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성공을 하면 누군가는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런 구조에서 어떤 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이 여럿 있다고 치자. 그런 신의 우열은 어떻게 정해질까? 만약 그 우열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어떤 신이 가장 강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신을 믿는 게 정상이 아닐까? 신들끼리 경쟁을 한다고?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신이라고 할 수 있나? 이러한 샤머니즘은 상식적으로 진리일 수가 없고, 이런 신앙은 '신이 왜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어떤 인사이트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체계화된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껍데기는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실질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수능 100일 기도, 예수 천당 불신지옥, 특별 새벽집회 같은 문화는 결국에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에게 자신의 복을 비는 행위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신을 이용하려 든다는 점에서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다. '배우자 기도'처럼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반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모순적인 것은 그들이 껍데기만 기독교이고 속은 샤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샤머니즘이나 다신교는 진리가 아닐 수밖에 없다. 이는 여러 신이 있다면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원리가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아인슈타인도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를 인정할 정도로 놀랍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신이 여럿이라면 이러한 세계는 만들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자연세계가 얼마나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면 신이 여럿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그 최상위에는 하나의 신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불교
다신교를 모두 배제하면 남는 것은 (개신교와 구교를 포함하는)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정도다. 하지만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꼽히는 불교는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선 질문을 해보자.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불교신자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불교는 냉정하게 얘기해서 종교가 아니다. 이는 불교가 어떠한 '신'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고도로 발전된 철학 체계 또는 세계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렇다 보니 사실 불교의 인간관은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이는 불교는 그 이론 전체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복잡한 철학적인 요소들을 이 시리즈의 목적과 취지에 맞게 단순화시킨다면 그건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강조되고, 누구나 일상에서 불성을 갈고닦으면 어느 정도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된다.
스님들이 설법에서 날카롭게 비판을 하고, 일리 있는 말씀을 해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불교에서 스님은 수양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정말 그러한가? 인간은 '누구나'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있나? 그리고, 만약 인간이 스님들처럼 속세를 떠나는 형태로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세상은 왜 나아지지 않나? 노력으로 다 된다면, 그런 진리가 있다면 왜 스님들 중에서 엇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스님들의 설법을 들으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내용들이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스님들은 속세를 떠나 살기 때문에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고, 그 스님이 그 상황에 처했을 때 본인이 가르친 대로 살아낼 수 있을지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설법을 듣고 있으면 마치 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주장만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일까? 사람들은 설법을 들으며 자신의 과거와 마음을 반성하지만 그에 대해 주어지는 해결책은 항상 '당신의 마음을 다스려라'는 것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세상에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까?
학문이 가장 이상적인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도 그 안에 진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상과 원리를 많이 품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불교는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실현시킬지에 대해서는 결국 '네가 노력해라'는 것 이상의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고,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만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왜 그런 원리를 갖게 되었을까? 불교는 이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지 못하고 건너뛰고 있단 한계를 갖는다. 불교는 드러나는 현상과 원리에 대해서는 어떤 종교나 철학 체계보다 깊은 인사이트를 주지만 그걸 넘어서는'초월적인' 영역은 건너뛴다는 면에서 한계를 갖고 엄격하게 말하면 종교라고 하기 힘들단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철학적 세계는 굉장히 깊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불교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마음, 자연 등에 대한 원리는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은 굉장히 의미가 있지만, 불교는 신이나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단 면에서 종교라기보다는 유교와 같은 철학 체계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대교
이렇게 다신교와 불교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유일신 종교는 유대교, 이슬람교와 기독교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종교는 기독교의 구약을 경전으로 공유한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성경 중 구약만으로 경전으로 인정하고, 이슬람교는 구약 부분과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계시와 가르침을, 기독교는 구약과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이 세 종교 중에 가장 모순적인 종교는 유대교다. 이는 유대교는 사람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하고 자신들은 선택받은 자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라고 전제하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창조'했다고 전제한다면 사실 '민족'은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개념일 수는 있어도 모든 인간은 결국 '인간'이란 면에서 하나의 뿌리를 갖는데 그중에 '유대민족'만 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게 모순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것 자체가 신이 만든 구분이 아닌데 어떻게 '선택받은 민족'이 따로 있단 말인가? 그런 개념이 성립하려면 신은 아시아인, 유럽인, 아프리카인, 유대인을 따로 만들었어야 한다. 유대교의 더 큰 모순은 구약에 의하면 중동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다 인정하고, 신이 유독 '아브라함'의 후손만을 '구원'받을 존재로 인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무엇을 위해' 선택하신 것일까?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구약의 내용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나고, 벌 받고, 광야를 돌며 고생하는 내용만 담고 있을까? '선택'받은 자들인데? 유대인들은 왜 그 후에도 계속 떠돌이 같은 삶을 살아야 했고, 지금도 극도의 긴장감 속에 팔레스타인 등 중동국가들과 대립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야 할까?
유대교는 이런 질문들에 어떠한 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유대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자신들의 민족의 역사만 설명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런 유대교는 거의 토착종교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구약에서는 분명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있는데 그 메시아는 도대체 언제 올지를 알 수가 없다.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이 있는데, 지금 유대인들 중에 다윗의 직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까? 그 메시아는 언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유대교는 이와 같은 모순점들에 대해서 어떤 타당한 반박도 제시하지 못하고, 수 천년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전혀 확장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는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이런 유대교는 구약을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내용들은 추상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그 분파에 따라 인간관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실 중심적'이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신은 자신들을 선택하고 모이도록 했으며 삶의 원칙을 제시한 존재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은 추상적이고 전 지구적, 인류적인 접근보다는 작은 현실의 디테일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에 대한 원칙들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교
오늘날에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많은 폭력적인 상황들로 인해 '이슬람=폭력적'이란 이미지가 없지 않은데, 사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무슬림들은 정치세력화되어있는 집단이지 이슬람교 그 자체는 아니다. 이슬람교는 그 교리만 보면 의외로(?)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이다. 이는 이슬람교에서는 경전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형제 종교'로 인정한다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기본적으로 '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전제하는데 생각해 보면 인간은 실제로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닌가? 무슬림들이 하루에 5번 기도를 하는 것도 사실은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신의 존재와 이슬람교의 선지자인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잊어버릴 수 잊고 실천해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에게 기도는 신과 그 신의 섭리를 기억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은 '신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이고,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신의 계획과 계시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일까? 그냥 모든 것을 본인의 뜻대로 휘두르고 인간이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이슬람교는 인간 세계를 설명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는 기독교 경전인 성경 중 구약 부분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갖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경우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찰을 갖고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표현만 다를 뿐 맥락은 비슷한 부분들이 분명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가 더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면들도 분명 있다. 다원주의자나 불가지론자들이 '어느 길로 가든지 정상으로만 가면 된다'라고 하는 것도 이처럼 어느 정도 이상으로 체계를 갖춘 종교들은 비슷한 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의 욕망과 욕구를 갖고 있고,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나 그런 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한 시도는 일면 비슷해 보이는 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를 봐야 한다. 이는 모든 것에 있어서 작은 차이가 끝에 가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원주의자나 불가지론자들은 '어떤 길로 가든 정상으로 가면 된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서 '어느 길로 가든지 정상으로 갈 수 있나?'라고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작은 차이들이 축적되면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작아 보이는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나게 큰 차이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불교와 이슬람교만 비교해 봐도 그렇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수양과 갈고닦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이슬람교는 신의 뜻에 따르는 것 자체가 목표로 설정된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는 '나를 갈고닦는 것'에 힘을 쓸 것이고 무슬림은 '신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더해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유대교는 '유대인'에 초점만 맞추고 '전인류적인' 관점은 크게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가치 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고 경전에 나와 있는 원리대로 삶을 살아내는 데 핵심이 있다.
이렇게나 인간관에 있어서 방향성이 다른 종교들이 과연 그 끝에 공통적인 결말을 낼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종교들은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안빈낙도'와 같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서 초연한 삶을 이상으로 설정하는 듯한 느낌은 있지만 그 방법에 다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어느 한 종교의 방법만이 그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니, 심지어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두 종교는 큰 틀에서 '신'이 설정되어 있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샤머니즘과 이 종교들의 다양한 인간관을 다 짬뽕해서 갖고 있다. 신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또 자유의지가 허락되었다고도 하고... 그렇다 보니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는 그냥 듣고만 있으면 이게 뭔가 싶을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실질에 있어서 샤머니즘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순 덩어리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로 모순되고 양립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다양한 면들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모두 담아내고 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균형과 '나를 갈고닦는 것'과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현실적인 부분들까지. 그 내용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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