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가족에의 이유. 4편
결혼을 하지 않고 살겠다는 생각은 비이성적이지도,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고, 환경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그런 생각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역사만' 살펴보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굉장히 큰 부분이 빠져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 그 변수로 인해 결혼을 하지 않고 살겠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일단 인류 역사상 '결혼'이란 제도를 살펴보자. 아니, 사실 결혼이라는 것이 제도화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고? 이는 제도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굉장히 근대적인 개념이고 사회가, 인간이 모여 사는 집단에 법제도라는 뼈대를 갖고 운영되기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48년에 쓰여진 법학의 정말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몽테스키의 '법의 정신(The Spirit of Laws)'이란 책을 읽어보면 당시만 해도 법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제도로서의 '결혼'은 그 역사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제도'로서의 결혼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으로서의 결혼부터 살펴봐야 한다. 완전한 원시시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해 보자.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어떤 이유에선지 생명체들이 교미를 해야 다른 생물을 낳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제하고, 창조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이 남자를 만든 후에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서 짝으로 여자를 만들어줬다고 치자. 이 글에서는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이 없다.
분명한 것은 원시시대에 인간의 가장 큰 과제는 '생존'이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강한 동물들은 인간의 안전을 위협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무리를 지어서 세력을 키우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세력은 사람의 수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원시시대에 결혼은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이 생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전 세계 곳곳에 있었던 부족 국가들의 문화에서 드러난다. 결혼은 두 부족이 다른 부족으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였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의 집단'임을 결혼이라는 제도와 혈연을 맺으면서 확인했고, 그렇게 확인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안전을 담보받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이러한 단위를 처음에는 남녀 간에 짝을 맺고 그 후에 다른 짝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 단위가 눈덩이를 굴리면 커지듯이 커져서 부족이, 그리고 국가가 됐다. 그들은 규모가 곧 안전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너무 원시적인 얘기 아니냐고? 아니다. 고려 시대에 태조 왕건이 왜 29명의 부인을 뒀을까? 조선 시대에는 왜 온갖 양반 집안들이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배출하고 싶어 했을까? 태조 왕건은 고려를 만들면서 체계를 안정시키고자 여러 부족들의 여성들과 혼인을 한 것이고, 조선 시대에는 조선 안에서 자신의 가정의 안전을 위해서 양반들이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배출하려 한 것이다. 그때만 그런가? 현대사회에서도 재벌 간 결혼을 하는 건 결국 자신들의 사업규모를 키우고, 안정시키기 위한 게 아닌가?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는 결혼의 본질은 '생존'이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일처제가 하나의 제도 비슷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그 시작에는 '남자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었을 것이다. 남자들이 생물학적으로 더 강하니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남자가 나가거나,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망하는 남자들은 항상 일정한 수준과 주기로 나타났을 것이고, 그럼 상황에서도 집단의 세력과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남자당 여러 아내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어느 정도는 존재했던 남아선호 사상도 그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집단의 안전을 담보하고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남자들은 항상 주기적으로 죽어나가는데 그런 역할을 할 존재는 항상 필요하니 생존을 위해서는 남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자에 비해서 여자는 죽을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훨씬 적었으니까.
여기까지만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구조를 보면 결혼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는 기술과 법제도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신체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보호를 받게 되었고, 생존에 필요한 돈과 환경도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과정을 통해 담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여자들이 굳이 남자들 없이도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되었고, 사람 숫자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대부분 기간, 어쩌면 100-200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이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과 달리 생존의 맥락에서는 결혼이 필수가 아니다. 아니, 결혼을 하는 건 그만큼 신뢰하기 힘든 개인과 공동의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적게 벌고 적게 가지고 살 수 있는 싱글로서의 삶을 사는 게 훨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런데 기술과 학문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특징'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은 그런 인간의 특징과 본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오늘날 결혼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의 한계는 [생존]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관습적으로, 제도적으로 결혼은 생존을 위해 생긴 게 맞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그러한 생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까? 아니다. 기록이 남아있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는 생존과 상관없이, 생존을 위해서 정략결혼을 한 사람들이 그렇게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바람을 피운 기록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남아있다. 남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그랬다는 기록들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인간이 그저 생존이 목표이고, 생존과 생계가 지상목표인 존재라면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이는 정략결혼을 했는데 배우자를 배신하고 더 낮은 계급의 사람이나, 다른 집안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에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까지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욕구와 욕정과 욕망으로 상대를 갖고 싶어서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오롯이 상대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과거에만 그런가?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해리 왕자는 집안을 등지고 자신의 아내와 가정을 꾸리는 것을 선택했다.
인류 역사에 남아있는 인간의 이런 기록들은 인간은 단순히 생존과 생계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그 지점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지점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것을 욕구와 욕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있지만 그러한 맥락이 아닌 사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 존재라고 정의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과거에는 '스트레스'라는 개념도,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힘들면 그게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도 거의 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괜찮을 수 있다거나 마음이 힘들다고 해서 몸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설명들이 설득력을 가졌던 시대가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마음, 정신과 몸은 굉장히 긴밀하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잘 안다. 그 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생물학적 작용도 상당 수준으로 밝혀진 상태다.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들을 요약하고 정리하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조금 더 행복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쉬는 것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걸 조금 더 단순화시키면 인간은 '정서적 안정'이 필요한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 정서적 안정을 느낄까? 인간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런 사람들과의 접점이 잦을수록 정서적 안정을 더 많이, 자주 느낄 수 있다. 그런 신뢰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그런 신뢰는 오롯이 감정만으로 형성되진 않는다. 감정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주고, 단기적으로 감정이 없는 사람보다 서로를 신뢰해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뢰는 감정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신뢰는 두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자라고 강해지며, 궁극적으로는 상대의 이해관계와 내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공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가 주는 안정감은 상대에 대한 호감을 다시 일으키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 낸다.
나는 사랑은 단순히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 선순환 고리라고 생각한다.
연애는 감정을 매개체로 두 사람이 상호 간의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다. 호르몬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은 3개월'이란 식의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서 3개월은 오롯이 감정으로 상대에게 내 벽을 허물어 가게 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이후로 깊어질 수 없단 것은 아니다. 그 3개월을 잘 보낸 사람들은 타오르는 호르몬과 엔도르핀의 작용이 아니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뢰를 통해서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 나갈 수 있고, 결혼은 두 사람이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호 간의 신뢰가 형성된 이후에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꾸리겠다고 하는 '다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이러한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공유되지 않는 사람과 신뢰를 더 깊게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이해관계'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수용받고 싶어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본인의 과거를 어느 정도 이상 알고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들어야 한다. 그게 내가 말하는 '심리적 이해관계'다. 그런데 과연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 그러한 심리적 이해관계까지 형성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처럼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수준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사회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서 경제적인 부분이 강조되는 것이 이해는 된다. 다른 것에 비해서 경제적인 부분은 분명하게 증명되고 수치화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곧바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단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재벌가끼리 결혼한 후에 이혼하거나,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재벌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자주 들려오겠나?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자주 들려오는 것은 경제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수준의 신뢰를 쌓기는 힘들다. 결혼하기 전에 그게 완벽한 수준으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하더라도 두 사람이 결혼한 후에는 그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연애를 통해서 두 사람이 볼 수 있는 상대의 모습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더 구체적인 얘기, 실패한 결혼과 그걸 그나마 방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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