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계점, 나

사랑학개론. 8화

by Simon de Cyrene

사랑에 대화와 노력이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대화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는 설레이고 매력을 느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감정적 흥분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꽤나 자주 만난다. 그중에는 정말 이기적이고 상대를 소유하고 자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대의 말을 굉장히 잘 듣고 노력하려는 사람들도 호감과 좋아하는 수준 이상으로 넘어가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그게 나의 한계여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꼭 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은 자라온 환경과 그 과정에서 가지게 된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공존하기 힘든 수준으로 힘든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닌 이상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도 없고,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을 이성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도 내가 가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한 번씩 만나는 좋은 지인이나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언제, 어떻게 특정한 사람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그 사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모두 본인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부터 영향을 받는단 것이다. 사람은 누구도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것들의 영향을 받아 특정한 성향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매력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특정한 성향이나 경향성을 가지게 되는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성추행과 성폭행은 엄격하게 처벌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스쳐 지나가듯이 한 행위일지라도 그 아이에겐 그게 평생 남을 수 있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의 사랑에 영향을 미친다. 그 정도가 심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우리가 평상시에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은 특정한 상황이나 사건을 계기로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성장하는 환경과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연애할 때는 몰랐는데 결혼을 해보면 배우자와 부모님이 비슷한 면이 많은 경우도 있는데 이는 그 사람이 부모님에게 익숙해져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향의 사람에게 익숙함을 느끼기 때문인 경우도 있고, 반대로 완전히 그 반대 성향의 사람을 찾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매 맞는 여성 증후군 (Battered Woman Syndrome), 스톡홀름 증후군, 리마 증후군은 물론이고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는 사람들도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람과 관계들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계기를 찾을 수 있다. 병적인 수준이 아니어도 그러한 경향성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그러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안고 산 기간이 길수록 회복하는데도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왜 어떤 성향의 사람에게 끌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했던 경험들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상처나 회복이 필요한 부분들은 상담을 받거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성향이나 경향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성은 상당 부분 바뀌지 않고, 바뀐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의 성향이나 경향성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너무 무거운 얘기들을 했지만 사실 이는 가벼운 부분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면 본인이 특정한 외모의 이성에게만 매력을 느낀다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건 자신의 경향성으로 받아들이고 유지해도 된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좋아하는 외모가 바뀌거나 외모를 보지 않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당장 노력해서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상이나 연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 그러한 성향이 노력으로 바뀔 수 있다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 본인이 연인과 하고 싶은 데이트나 스킨십 같은 것들도 누군가의 요구나 강요에 의해서 바꾸거나 맞추기보다는 본인을 지키고 본인의 것을 고수하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대화를 하다 본인도 상대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어 맞춰지게 된다면 모르지만 상대가 당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바꿀 것을 강요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당신을 자신의 도구로 여기면서 목적에 맞게 사용하려는 것이고 그렇게 바꾸고 맞춘 것은 자신에게 상처나 트라우마로 남아 그 이후의 사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일찍 정리되는 게 축복이고, 세상에는 그보다 나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우리는 이와 동시에 상대와 내가 부딪히게 되거나 잦은 갈등으로 인해 이별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이 이별을 하게 된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상대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고 당신을 자신의 욕구와 욕망의 도구 정도로 여기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트로피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상대의 그런 지점들은 상대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에 비판을 넘어 비난을 해도 된다.


이별 후에 나의 한계를 돌아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의 어떤 면이 이기심에서 발현된 것이었고, 어떤 것이 본인과 다름으로 인해 발생한 갈등인지를 구분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쓰레기통에 넣되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어떤 면으로 인해 그 갈등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돌아보라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서 본인이 상대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꼈는지까지 돌아보면 우리는 내가 어떤 면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고, 다음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떤 지점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펴봐야 하는지, 한 걸음 더 나가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 사람인지를 객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이별이 곧 실패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이별은 실패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별 후에 힘들고 우울해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다음 사람을 감정의 흐름을 따라 만난다면 그 이별은 아무 의미 없는 실패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별을 통해 나 자신을 조금 더 잘 알게 되고, 그러한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본인과 더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 이별은 실패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말은 쉽게 했지만 이게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타오를 때는 아무리 식히려고 해도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이 누군가를 향해 가더라도 자신의 한계와 상대와 같은 사람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면 우리는 감정에 브레이크를 잡고 상대를 더 지켜볼 수 있게 되고, 많은 경우 그렇게 브레이크를 잡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상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감정이 생각보다 빨리 식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물론, 브레이크를 꽤나 세게, 오랫동안 밟아야 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사랑에서 감정이 보다 이성이 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감정이 타오르면 식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면 감정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식는다. 그걸 나의 경험과 생각과 의지로 식히는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상처를 입고 식게 되는지, 아니면 뜨거운 불이 자연스럽게 뚝배기 같이 은은한 온기로 변하는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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