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불안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따지고 보면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좋아하는 인스타그램 웹툰에서 아동 실종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나니,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한 사람으로서 예방에 대한 경각심이 생긴 것이다. 경찰서 미아 등록이나 미아 방지 팔찌, 목걸이 등 예방법에 대한 정보들을 읽는 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놈의 호기심이 결국 나를 실제 사건 사례로까지 이끌고 말았다.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잠시 약을 먹고 잠이 든 사이에 혼자 현관문을 열고 나가 영영 실종되어 버린 아이, 집안에 모든 가족들이 모여 있었는데도, 잠시 어머니가 목욕을 한 사이에 아이가 영영 사라져버린 일본의 미제 실종 사건, 사람이 붐비는 대형 마트에서 아버지가 잠시 계산하느라 손을 놓은 사이 사라져버린 아이까지. 집 안팎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 사례들을 읽고 있자니, 눈 깜짝할 사이 불안이 나를 잠식하고 만 것만 같다.
아니, 혹은 공교롭게도 부모로서의 공감, 부모만이 자신의 아이에 대하여 느낄 수 있는 불안감의 전이일지도 모른다. 내 앞에서 웃고 재롱부리며, 때로는 인내심을 시험하듯 신경질을 쏟아내는 이 예쁜 아이가 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는, 너무도 흔해빠진 탓에 귀 기울일 생각마저 들지 않는 이 만고불면의 진리에 ‘내 아이’가 속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 말이다.
최근 며칠 간 잠을 설친 것도 이 때문이다. 잠만 들면 내 아이가 버려지거나, 길을 잃어버려 울고 있는 꿈을 꾸는 탓이다. 꿈은 점점 더 구체적인 이야기 형태를 갖추어간다.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나던 그 불행들이, 날이 갈수록 기승전결을 갖춘 단막극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항상 부주의한 탓에 내 아이의 손을 놓쳐버리고, 울부짖으며 아이를 찾아다니다가 늙어버리고는 한다. 그리고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면, 옆에서 곯아떨어진 내 아이를 보며 잠시 안심하고 나서 이를 갈며 다짐한다. 범인 녀석 한 번 더 꿈속에 나타나라. 내가 당장 보자마자 그 목을 비틀어주지, 라고.
부정적인 생각, 나쁜 꿈들은 최대한 많은 이들과 나누어 털어냄으로써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불안을 전화로, 카카오톡 메시지로 친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퍼뜨리던 중 한 친구가 핀잔이다.
“그렇게 하자면 벙커 안에서 24시간 내내 끼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여 황당한 투로 동류의 불안감을 털어놓기도 한다. 나 역시, 갑자기 세상에 좀비 아포칼립스가 도래한다면 우리 아이 먹여 살릴 생각에 갑갑할 때 있다만. 이 말을 들으니, 불안은 삼천포로 빠진다. 우리 집에 분유가 얼마나 남아있더라, 이유식은 어느 정도 비축해놓아야 하나. 만약의 재난 상황을 대비해 쌀은 몇 가마니나 더 사놓아야 할지. 최소한의 생존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수호를 위하여, 나는 얼마만큼 대비해야 하는가. 먹을 것도 문제지만, 싸워야 살아남는 세상이라면 무기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각종 호신무기 검색으로까지 향하다가, 내가 무슨 짓까지 하나 싶은 생각에 핸드폰을 침대 위로 휙 던지고 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불안이란 안전과 맞닿아 있다. 불안을 느낌으로써 내가 조금이라도 더 조심하고, 다가올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마냥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안전하고 평안하다고만 느낀다면, 시시각각 도사리는 우연한 위험들을 맞닥뜨렸을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화재에 대한 불안을 느낌으로써 한 번 더 가스 밸브를 점검하는 등 화재를 예방하고, 교통사고에 대한 불안을 느낌으로서 교통 법규를 준수하는 등 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 않은가. 성가신 감정일지언정, 이를 ‘감정 소모’라고 치환하기보다 불안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현명한 대비책을 세울 기회로 삼기로 다짐한다.
그리하여 일단 미아 방지 목걸이와 팔찌는 주문 완료하고, 호신용품은 무엇으로 살지 계속 고민해본다. 기왕이면 꿈속에도 가지고 들어가서 나를 위협하는 ‘그 놈’의 뚝배기를 시원하게 깨 줄 수 있는 놈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