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결혼하자마자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고모할머니의 중매로 만난 뒤 고작 3개월, 연애보다 협의에 더 가까울 몇 번의 만남 끝에 우리는 결혼을 결정지었다. 누가 봐도 딱 맞는 한 쌍이거나 운명의 사랑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이는 당시 37살, 나는 32살로 결혼적령기이거나 그 시기를 살짝 넘겨가는 중이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은근한 수준을 넘어선 압박을 받고 있던 것뿐이다. 우리 둘 다 이 시기를 함께 넘어갈 ‘적당한’ 누군가가 필요했고, 서로가 상당히 괜찮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당하다는 말이 얼마나 정의하기 어려운 말인지, 특히 결혼을 고민해 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적당한 외모, 적당한 경제력, 적당한 성격, 적당한 인간관계, 적당한 가정 배경. 탐색전 끝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하기 그지없는’ 상대임을 인정했고 톱니바퀴는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그러나 상대방의 외적인 조건들보다 내면을 따져야 진정한 ‘사랑’이며 ‘결합’이라는 세간의 시선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던 터라, ‘왜 결혼을 결정했냐’는 사람들의 물음에는 ‘적당히’ 둘려댔다.
“하다못해 운전할 때도 욕 안 하더라니까? 옆 차가 엄청 거칠게 끼어드는데 침착했던 모습 보고 나 정말 놀랐잖아. 이 남자다, 싶었지.”
또한 같은 질문에 대해 그이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알 수 없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 나 역시 절반의 진실을 100%의 진실인 양 떠들고 다녔으니 상대방이 하는 말들의 진위를 가리며 서운함을 토로할 생각은 없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를 따지며 그이의 무관심을 힐난할 자격 따위 나에게 있을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그의 취미가 무엇인지, 그가 여가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영화가 뭔지.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고락을 함께하는 가족이라기보다 하우스 메이트에 가까웠다. 냉장고와 식탁을 공유하지만 식사는 대부분 따로였고, TV를 함께 쓰지만 소파에 앉아 상대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본 적 또한 없었다. 신혼 초기 낭만을 흉내내보려 몇 달 간 침실을 함께 쓰기는 했지만,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 잠꼬대와 이갈이, 가스 배출 등의 생리적 현상들에 불면증까지 공유하다가 결국 우리는 분리됐다. 드레스룸과 화장대가 있는 큰방은 내 차지가 되고, 그이는 거실 화장실을 독차지하는 대가로 작은 방으로 밀려났다. 그는 오전 6시, 나는 9시로 출근 시간도 다르겠다, 서로에게 숙면을 보장해주는 취지라며 합리화하고, 때로는 이 얼마나 ‘쿨’한 21세기형 부부인지 경탄을 늘어놓기도 했다. 각 연령대마다 이루어야 할 인생의 단계, 그 중 하나가 결혼이라면 이렇게 서로를 그 수단으로 내세우며 독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이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생각했다.
부부이지만 친구보다도 건조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멍하니 바깥을 구경하다가 다정한 부부들을 보며 그 자리에 나 자신을 대입해보곤 했다. 신뢰보다도 더욱 견고한 애정, 함께 영겁조차도 넘어설 수 있다는 각오들,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것들을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 자문했다. 이는 그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드라마나 영화 속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며 남녀 간의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강렬히 열망했을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들을 열망하며 우리는 조금씩 물밑에서 알력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로맨스 소설을 몇 건 놓아두거나, 상대방이 집에 들어올 시간에 맞춰 넷플릭스 로맨스 영화들을 틀어놓거나 그런 것들. 눈치를 보고, 말을 하려다가 뒤돌아서는 날이 늘었다. 함께 있으면 한 시간이 열 시간으로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거슬렸다.
“우리 좀 이상하지 않나?”
이어폰을 꽂고 책을 보고 있던 모처럼의 휴일, 그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짜고짜 뭐가 이상해?”
“일반적인 부부는 아닌 것 같아서, 우리가.”
“일반적인 부부가 뭔데?”
“같이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방 쓰고, 같이 영화 보고, 데이트도 하고, 아이도 갖고. 그런 거겠지?”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잖아.”
‘부부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그러나 철학적 논쟁보다는 다툼을 넘어 때로는 개싸움으로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건조함과 냉정함을, 무심함을 힐난했다. 신혼 초기에는 서로의 개성으로 인정했던 모든 요소들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결국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 또한 그저 평범한 남자와 여자였음을,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자신을 품어줄 거대한 우산과 벽을 원했음을.
끝은 담담하게 찾아왔다. ‘사랑과 전쟁’과 같은 격렬한 서사는 없었다. 동사무소에서 가족 증명서를 떼어 오듯 지루한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연인 간의 막장 서사는 서로에게 감정의 찌꺼기나마 남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34평의 집을 나누어 처분하고 14평 남짓의 오피스텔에서 홀로 보낸 첫 밤, 침대에 귀를 대고 누워 매트의 사그락사그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는 나 이외에 그 어떤 온기도 없을 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냉장고를 채우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포스터로 거실 벽을 꾸몄다. TV는 그이가 가져간 탓에, 노트북 화면으로 밤새 영화를 보다가 의자 뒤로 몸을 젖히고 잠에 빠지는 날도 많아졌다.
집안이 너무 고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의 샤워소리, 통화 소리, 냉장고 뒤지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집은 모델하우스처럼 버석할 뿐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졌다. 야근도 늘었다. 친밀도는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연락이 닿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런 약속조차도 없는 날이면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나가 카페에서 하염없이 앉아있기도 했다.
자유를 원하면서 구속을 꿈꾼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새벽부터 그 다음 새벽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데도 즐겁지 않다. 하루를 보내며 내가 겪었던 것들, 느꼈던 감정, 그 시시콜콜한 것들을 나누는 사람, 그 따뜻한 온기가 내 생활 속에는 없다. 그저 밋밋한 시간들만 흘러간다.
친구 부부의 이사 기념으로 집들이 초대를 받았다. 결혼한 지 4년차, 이제 좀 건조할 법도 하건만 지금도 제법 신혼 태가 난다. 서로 손을 만지작거리고, 통통이 돼지라느니, 뱃살 대마왕이라느니 귀여운 핀잔을 주고받는 모습도 즐겁다. 나는 괜히 연거푸 소주를 들이붓는다. ‘쿨’이라는 껍데기에 매몰되어 잊고 있었던 사람살이의 맛, 이제는 찾을 길조차 잃어버렸음을 애석해할 수밖에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