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일기 20032023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스쳐 지나가는 정도라고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길거리에서 봤으면 그냥 각자가 살아가는 각본에 잠깐 등장할 법한, 그 비중이 커봤자 ‘행인 1’, 솔직히 너무 많아서 다 번호를 붙일 수도 없는 그저 대중 정도의 사람일 것이죠. 딱 그 정도. 단지 내 주변 인물이 주요 인물로 배역이 바뀌는 순간은 보통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환경 조성일 때가 대다수입니다. 그저 같은 반이 한 번 되었다고, 어쩌다 수업 한 번 들었다고, 그 계기는 순간적으로 별 거 아니라고 생각되는 촉매일 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그것은 연약한 사슬에서 만남이 점층 될수록 재료 역시 쌓여 탄탄한 대교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별을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하는 연인들은 없듯이, 요즘 흔히 말하는 ‘손절’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인간관계는 없을 거예요. 서로 좋은 면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서 생산적인 인간관계로써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고 알아가는 과정 중에서 문제가 생겨서 멀어지는 것이 분명하죠. 내가 변한 것인지, 상대가 변한 것인지, 어쩌면 둘 다 다른 인간관계에 사로잡혀 상대적으로 서로한테만 소원해진 것인지.
주식 용어로 주로 사용되던 ‘손절’이 인간관계에서 헤어짐을 의미하도록 보편화된 시점은 2020년 3월 주식 대폭락 이후, 일명 ‘동학 개미 운동’이 시작되면서 일반인 주식 투자자들이 갑자기 많아졌던 그 어느 순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는 점은, 왜 ‘익절’은 ‘손절’만큼 자주 사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잘 만나고 있는데 갑자기 헤어질 필요가 없기도 하고, 학생 때라면 좁은 범위라면 반이 달라져서, 넓게는 학교나 지역이 너무 멀어져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멀어졌을 뿐 정말 절연된 것은 아니라서? 사실 손절이지만 서로 나쁜 사람으로 남기기 싫으니 서서히 멀어지기로 한 것일 수도 있죠.
어쩌면 인간관계는 주식으로 따지자면 내 계좌에 파란불이 들어왔을 때부터 미묘한 서늘함을 느꼈기에 천천히 지켜보다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듯이 한순간에 손절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정은 순간이지만 여운은 그리 빨리 나에게서 사라질 수 없을 것이에요.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나면 그래도 그 사람이 나한테 잘해줬던 일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드문드문 생각나고,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돌려서 ‘나는 그 사람한테 항상 잘 해준 순간 밖에 없을까?’라는 나름의 자아성찰도 생길 것이죠. 일을 저지르기 전에 고민했던 점들이라도 일을 결단한 사람이 나라서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수 있고요.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자연스러워요. 그 감정이 흐르는 결이.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맞물리는 광경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살아갈 때면, ‘누군가 미리 써놓았던 각본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자주 생각이 듭니다. 첫 장면에서 중요했던 등장인물이었다 해도, 회차가 거듭될수록 그 비중은 방대해질 수도 있지만, 역으로 자연스레 비중이 줄어서 더는 각본에 없는 인물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쓴 각본 같은 내 인생에 등장인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잊었던 배역이 다시금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더 보고 싶은 내용이 있더라도 작가가 쓰지 않는다면, 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결국 잊힐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나타나도 ‘당신은 나에게 또 무엇을 가르쳐주려 나타나셨나요?’, 누군가 사라져도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셨나요?’ 그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냥 화살이 나에게 가지도 않고, 그들에게 가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