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달린 사람이 진짜 있더라
우리 외삼촌 No.3는 40대 후반 싱글대디이다. 삼촌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던 시절도 있었고 결혼을 늦게 해서 내가 어렸을 때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그래서 삼촌은 나에게 친구 같으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올해 삼촌의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돌봄 교실 하교부터 삼촌의 퇴근시간까지 마땅히 봐줄 사람이 없는 관계로 이 삼수붕어가 삼촌집에 와있다. ‘초품아’에 살아도 사촌동생이 학교 생활이나 등하교 방법을 익히기 전까지 조금이나마 도와줘야 해서 삼촌이 부탁했다.
내가 어렸을 때 삼촌이 많이 놀아줬고, 방학 때도 삼촌집에서 며칠 살면서 놀러 다녔으니, 나도 당연히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맞벌이 가정에서 자랐으니 사촌동생이 어떤 감정일지 잘 알 것 같다.
삼촌이 퇴근하고 저녁을 같이 먹을 때나 집안일을 할 때, 나랑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그때 삼촌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를 해봤다. 삼촌도 본인 삶에 대한 인터뷰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전반적인 생애를 얘기해 줬다.
일단 독자분들이 삼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삼촌은 20대에 누나(필명25 엄마)를 보러 부산으로 놀러 왔었다. 마침 우리 부모님이 다니던 직장에 일손이 필요해서 잠깐 다녀볼까 했던 게 벌써 25년 전 일이 되었다. 이 관계가 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필명25의 친가 친척분이 운영하시던 회사에서 다른 친척 한 분, 우리 부모님, 외삼촌 No.3까지 25~30년은 일했으니… 옛날 사장님과 사모님 은퇴 후에 우리 부모님이 다시 시작한 지금은 부모님 재량에 따라 외삼촌 No.3의 상황을 배려해 주기 편해졌지만, 그전에는… 이하 생략(여기 당근 두 개 흔들고 있어요!)
“삼촌은 이혼 후에 지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일과 육아 중에 하나라도 쉬지 않고 병행했잖아? 그 방법을 좀 얘기해 줘.”
“애가 100일 좀 넘었을 때부터 나 혼자 키우게 되었지. 갓난쟁이는 2시간마다 분유를 먹여야 해서 정신없었어. 첫돌까지는 주말에 예방접종한다고 애 데리고 병원 가는 일이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있었어. 회사에서 내내 시달리다가 돌아온 주말이 주말같이 않았지. 어린이집은 10개월쯤에 처음 맡겼는데, 내가 9 to 6 근무라도 출퇴근 시간 때문에 아침 8시~오후 7시까지 매일 맡겼어. 출퇴근이 편도로 50~60분은 걸리니까 압박감이 심했어. 가끔 늦어도 어린이집 선생님들께서는 이해해 주시지만, 일단 내가 그런 게 너무 죄송했어. 애 픽업 시간이 촉박하니까 회사에서나, 어린이집에서나 부담을 많이 느꼈지. 요즘은 토요일에 어린이집이 거의 안 하는데 내가 격주로 토요일에 근무하잖아? 그때마다 국가 지원이 되는 돌봄 선생님을 신청했어. 그 지원이랑 어린이집 종일반이 없었더라면 병행이 힘들었을 거야. 정부 지원을 최대한 받으려 해도 올해부터 내가 해당되는 소득 구간이 애매해져서 지출은 커졌어. 예전에 내가 3을 부담하고 국가가 7을 해줬다면, 이제는 거의 5:5는 돼.”
“도움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건 남자든 여자든 다 힘들겠지만, 싱글맘은 일반적인 사회 통념이 있는데, 싱글대디는 상대적으로 덜하지?”
“맞아. 아빠가 혼자 애를 키운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거의 없어. 키우더라도 조부모님이나 주위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나처럼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인식이 정말 없어. 정부 지원도 받기 힘들어. 한부모로서 소득이 평균 정도만 되어도 한부모제도에 인정이 안 돼. 저소득층/차상위계층 정도가 아니면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없다고 보면 돼. 오히려 복지 사각지대에 들어가.”
“돌봄 교실 신청도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응. 처음에 애가 학교에 들어가니까 돌봄 교실 제도를 알아봤지. 어린이집 종일반처럼 애를 봐주면 그나마 일할 수 있으니까. 그 신청서 선택란에 차상위계층/한부모/맞벌이/취준생 등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당연히 한부모라고 생각해서 인터넷으로 서류를 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떼지더라? 나보고 대상자가 아니래. 관청에 문의하니까 법정한부모가 있고, 일반적인 한부모가 있다고 하더라고. 서류를 뗄 수 있는 한부모가 따로 있대. 담당자가 직접 한 얘긴데, 아버님이 애를 완전히 혼자 키우시는 경우도 잘 없고, 엄청 많이 버시는 건 아니지만 평균의 벌이는 받으시니까 지원을 받을 수는 없고, 실질적인 한부모로 인정도 못 받는대. 그래서 서류도 안 나오는 거고. 월급이 한 180~190만 원 이상되면 한부모가정이 아니래. 그 제도에 어이가 없었지. 서류도 안 나오는데 신청은 해야겠고, 어디에 체크할까 한참 고민했지. 결국 체크를 못 하고 그냥 신청서를 냈어. 돌봄 선생님이 나중에 나한테 전화하셨어. 한부모임을 증명하라 하더라? 그것도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하다가 가족관계증명서를 냈는데, ‘아버님 이혼 안 하신 거 아니에요?’라고 다시 전화가 왔어. 그게 알고 보니까 내가 가족관계증명서 ‘일반’으로 내서 이혼한 애 엄마까지 나와서 설명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가족관계증명서 ‘상세’ 내역으로 다시 제출하니까 나중에 1순위로 됐다고 연락오더라. 개인적으로 이런 제도가 참 안타깝다.”
“그렇게 일하는 동안 애를 맡겨도 삼촌은 퇴근해서 집안일이 많잖아. 아이를 데려와서 집안일은 혼자 어떻게 했어?”
“애를 집에 데리고 오면 먹이고, 씻기고, 빨래, 청소, 설거지 등 집안일만 하다가 새벽 1시에 자는 게 일상이었어. 하루에 6시간은 잤나? 애가 8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야. 이 삶을 안 살아본 친구들한테 얘기하면 ‘야, 그거 그냥 대충 하고 10시에 끝내면 안 되냐?’라고 하는데, 너는 이 집에 와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다 봤잖아. 퇴근해서 씻기고, 밥 먹이기만 했는데 설거지하면서 시간을 딱 보면 벌써 10시야? 맨날 기저귀 갈아입히고, 잠도 못 자고, 너 같으면 내 삶을 쉽게 선택하겠니?”
”아니. 난 혼자는 절대 못하겠어.“
“그러니까. 이 삶이 말로 하면 짧지만, 나도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해. 알고는 못 가는 게 인생이잖아. 또 내가 어릴 때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던 영향도 있지만, 편부모니까 혹시라도 없는 집안 아이처럼 보일까 봐 옷에 신경도 많이 썼거든? 선입견이 너무 심하니까? 다행히 내 노력이 빛을 봤는지 우리 애를 겉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 혼자 키우는 아이인 줄 잘 모르더라… 그래도 나는 다시 돌아가면 절대 절대 똑같이 못 살겠어.”
“아무래도 삼촌 혼자 애를 보면서 집안일을 해야 되니까 결국 스마트폰을 줬잖아. 언제 처음으로 애한테 스마트폰을 줬어?”
“나도 애한테 스마트폰을 안 쥐어주려 했지. 근데 식당을 가보니까 유모차 탄 애기도 폰을 보고 있더라. 요즘 다 그렇대? 그래서 4살 때 처음 쥐어줬어. 애한테 주면 확실히 내가 집안일하기 편했지. 애가 집중하기 좋은 영상이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줘서 단점도 있지만, 글씨나 숫자도 유튜브로 애가 스스로 배워서 그냥 두는 편이야. 요즘 애기들한테는 유튜브가 완전 선생님이지.”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부분을 상세하게 풀어서 말해준다면?”
“나도 인간적으로 애 키우면서 쉬고 싶어. 얼마나 쉬고 싶겠냐? 애를 책임지기로 했으니 희생하고 사는 거지. 옛날 사장님은 애를 여자한테 주지 왜 네가 키우냐라는 말까지 나보고 했어. 그게 7년 전이었나? 그때 개인적인 충격을 굉장히 많이 받았지. 아무리 사장-직원이라도 할 말, 못할 말이 있잖아… 그때는 임금도 적었는데, 빨간 날에 다 일했으니까 애 키우기 더 힘들었고. 까놓고 얘기해서 직장 다니면서 애를 혼자 키우는 게 정말 어려워. 나처럼 일반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은 정말 힘든 선택이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시골에 계신 애기 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같이 산 것도 아니고… 예전에 엄마를 토요일에 한 번 모시고 와서 출근했는데, 일요일에 바로 가버리셔서 감정도 좋지 않게 되었거든. 밥도 안 드시고 가셔서 너무 황당했어. 둘이 붙어도 애 하나가 힘든데, 하나가 일도 하고 애도 키우는 게 쉬울 수가 없어. 혼자 살라고 하면 편하겠지만 책임질 대상이 생기는 건 정말 무거운 일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홀로 사는 게 외로움은 있지만 그만큼 편한 부분도 있고 뭐든지 다 장단점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를 키우는 보람이 있다면?”
“결국 소소한 행복이지. 애기랑 산책을 간다거나, 맛있는 걸 같이 먹을 때… 하다못해 내가 이렇게 일을 해서 햄버거 하나라도 먹일 수 있구나 하는 흐뭇함? 애기가 아빠, 아빠 하면서 따라오는 게 행복해. 내 피를 받은 누군가가 나를 아빠라고 불러줘서 좋아.”
“아까 잠깐 언급한 것처럼 삼촌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는데도 애를 낳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책임감이 가장 컸고. 네가 만약에… 몇 년 후에 사랑하는 사람과 애를 가졌을 때, ‘얘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궁금함이 있잖아? 또… 키워보니까 저렇게 까불어도 내 새끼라서 예뻐. 다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촌은 이혼을 한 번 경험했는데, 그 경험을 토대로 본인이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가 뭐야?”
“사랑은 서로의 배려가 필요하고,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면 안 돼. 신뢰가 중요하지. 일단 첫 번째도 배려, 두 번째도 배려…”
“내가 어린 시절에 받지 못한 사랑을 내 아기한테 표현하는 기분은? 혹시 삼촌의 유년시절 상처가 치유되거나 했어? 대리만족?”
“행복해. 그래서 부모를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 어린 시절은 치유가 안 되더라. 그게 어떻게 사라지겠니? 나는 쟤만 한 때부터 시골에서 지게 지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고 했던 아픈 기억이 있어. 하하, 지금 생각하면 지게가 날 지고 다닌 꼴이지. 남들은 조선시대에 살았냐고 하는데 진짜 내 삶이 그랬다니까? 그래서 내가 키가 안 컸잖아. 그때는 애가 나무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주니까 그게 좋은 건 줄 알았지. 그 시절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중학생쯤으로? 첫사랑을 만나고 순수했던 시절로. 지금은 온전히 사랑을 쏟아부어도 되는 존재가 생겨서 좋지만, 한편으로는 애기한테 미안한 감정도 커. 그냥 내 애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혼자 남을 아기가 상처받지 않도록.”
“40대 후반의 나이에서 회고했을 때, 삼촌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뭐야?”
“나도 50을 바라보는 나이니까 벌써 평균 수명의 50~60%는 살았지. ‘정말 좋은 사람과 일반적인 가정을 꾸렸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평범한 삶이 제일 좋더라. 그만큼 어렵고.”
“결혼이나 육아를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지 자기가 선택한 것에는 의무가 따르잖아. 결혼을 해도 남자든 여자든 상대방을 신뢰하고 책임져야 되잖아. 그 신뢰가 있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못하는 거지. 나도 어릴 때는 주변에 유모차를 끌고 다녀도 노는 게 재밌으니까 눈에 잘 안 들어오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게 더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좋은 사람과 평범하게 적절한 시기에 결혼과 출산을 하고 사는 게 제일 좋다고. 하지만 책임을 못 지겠으면 안 하는 게 낫지. 결혼에 대한 환상으로만 살기에는 너무 힘들어. 그게 결혼은 현실이라는 뜻이고. 예쁘고 잘생긴 얼굴 보고 사는 거는 길어봐야 석 달 지나면 끝이야.”
날개 달린 외삼촌 No.3의 생애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