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그랬더라면…
“우리 외갓집 친척들이 시골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해.”
“나는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너무 가난했어.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이랑 고기를 먹은 게 아버지 장례였어. 나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다녀오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당시에는 죽음이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 우리 집 뒤에 엄청 큰 묘터에서 친구랑 그냥 놀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아버지 상여날이었더라… ‘이제 가면~ 언제 오나~’하는 노랫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맛이 그때 먹은 육개장이랑 쥐포채야. 요즘도 먹는 음식인지는 모르겠는데, 진미채 말고 쥐포채가 따로 있어. 가난했으니까 아버지 상 치를 때 제대로 된 음식을 처음 먹은 거야.”
“외할머니가 고기를 평생 못 드셔서 나중에 자식들이 사드릴 때도 못 드셨다고 들었어.”
“맞아. 고기를 먹을 형편이 안 되니까… 반찬이 있어도 김치 하나 정도였거든. 그거도 잘 없었어. 가족이 너무 많으니까. 겨울에는 정말 배고플 때 무 뽑아서 먹고. 할머니도 처음에는 잘 못 드시다가 자식들이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읍내 소고기집에서 사드리니 조금씩 드신 거지.”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형편이 더 안 좋아졌을 건데… 어떻게 살았어?”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생계가 힘들잖아. 엄마가 장사를 많이 했어. 국민학교 운동회하면 엄마는 운동장에서 소고기국밥이랑 닭개장을 팔았어. 장사 준비하려면 내가 아침에 다른 애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경운기에 그릇이며 냄비며 싣고 운전해서 팔았지.”
“국민학교 때 경운기 운전을 했다고? 그래도 돼?”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했어. 국민학교 4~5학년쯤 경운기 몰았나? 엄마도 고생 많았지만, 나도 고생 많았다.”
나중에 외삼촌 No.4에게도 물어봤는데, 경운기쯤이야 발로 운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3월이면 내가 산에서 고사리 꺾어 오고, 엄마가 그걸 삶고 다시 말려서 장에 나가서 팔았지. 찐빵 장사도 했고. 요즘은 산에서 나무 하면 안 되지만 그때는 됐거든? 아카시아 나무가 비 와서 젖어도 잘 타서 그걸로 불을 때었지. 도끼질도 했다니까? 그게 내 국민학교 시절,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얘기야. 이런 얘기를 내가 고향 친구들 말고 회사 형님들이나 지인들한테 하면 너 조선시대 사람이냐고 한다니까? 근데 진짜야.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자랐어. 이게 거짓말이 아닌데, 내 얘기를 드라마로 하면 작가가 욕먹을 정도야. 저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할걸? 나는 동네 사람들 밭에 가서 일도 했어. 어떤 아저씨가 외주 받아서 나를 데려가면, 트랙터가 없을 때니까 내가 경운기 운전해서 밭 갈고, 품삯 중에서 용돈으로 천 원씩 받고 그랬지.”
“엄마 말로는 먹을 게 너무 없으니까 이웃집에서 챙겨주셨다는데 삼촌도 누구였는지 기억나?”
“밑에 집이 방앗간을 했었는데, 그분들이 아이가 없으셔서 우리한테 떡 뽑고 남은 쌀 찌꺼기를 챙겨주셨어. 그걸로 집에서 수제비 해 먹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감사하지.”
“중학교 때는 어떻게 살았어?”
“집이 가난해서 애들이 무시하니까 계속 당하고 있지만은 않으려고 많이 싸웠지. 내가 지게 져서 몸집은 작았는데, 농사를 많이 지으니까 몸이 단단했어. 우리는 그걸 ‘뼈닥심’이라고 했거든? ‘뼈다귀 힘’. 나중에는 애들이 잘 안 건드려서 다행이었지. 두루두루 잘 지냈어. 내가 선도부장도 하고. 영화 ‘친구’가 우리 얘기야. ㅇㅇ이(외삼촌 No.4)는 내 덕 많이 봤다. 선배들이 걔랑 친구들 무리 집합시키면 걔는 ‘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바로 빠져나오고. ㅇㅇ이 선배가 내 후배였으니까 못 건드렸지. 다 연결돼 있어서.”
“고등학교 때는?”
“또 싸웠지. 중학교도 처음에 여러 초등학교에서 모이니까 자기들끼리 텃세 부리고 못 사는 애들 무시하잖아.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어. 또 나중에는 중학교 때처럼 다 잘 지내고 애들도 나 안 건드리고. 내가 원래 인문계였지만, 집이 가난했으니까 고3 때 국가지원으로 직업 교육을 받았어. 그게 제일 좋은 게 학비가 면제돼. 너도 알다시피 할머니가 자식 교육 시키는 걸 별로 안 좋아했어. 학교 가는 것도 돈 들어가니까 가지 말고 당장 돈 벌라고 했단 말이야.”
“자식들이 너무 많아서 큰돈이 들어가니까 미래의 가치를 키우기보다 당장의 환금성에만 급급했던 걸까?”
“그렇지. 우리 친구들은 집에서 공부하라 했는데, 우리 집은 공부하라는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단 말이야. 돈만 벌라고 했지. 나가서 농사 좀 거들라고 하고. 시골에서 우리 집처럼 가난하게 산 집도 있었지만, 피아노 학원, 주산 학원 다니는 친구도 꽤 있었어. 외진 곳이라 학원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 친구들 데리러 학교 앞에 학원차가 오고 그랬어. 우리 집이 좀 극단적으로 교육비 들어가는 거에 부정적이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도 겨우 갔고, 누나(필명25 엄마)도 중학교 졸업하고 부산에서 자기가 벌어서 고등학교 학비 냈고.”
“직업 교육 가서 어떻게 살았어?”
“그걸 하면 보통 막노동 현장으로 가. 나랑 내 친구 하나랑 전기과를 가서 전기공사자격증을 땄어. 그 교육받을 때 학교는 2주에 1번인가? 대부분 시험 때문에 불러서 잠깐 갔지. 자격증을 따고 친구랑 취업을 나갔어. 대구로 간다고 집에 말하니까 엄마가 처음에 15000원인가 쥐어주더라고. 그렇게 간 곳이 성서공단이었어. 관리자가 기숙사 원룸으로 데려가더라고? 현장을 가보니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막 형성될 때라 허허벌판이었지. 낙동강 하수처리장에 갔는데, 너무 겁나서 친구랑 짐 챙겨서 도망갔어. 친구는 누나가 대구에 산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나는 작은 형한테 공중전화로 연락해서 갔지.”
“작은 삼촌 돌아가시기 전에 구미에 살지 않았어? 그래서 장례 후에 집정리도 구미에 사는 ㅇㅇ삼촌(외삼촌 No.5)이 한 거 아니야?”
“형이 마지막에 본인 삶이 몰락하고 구미로 떠난 거고, 원래 대구에 정착했었어. 그때도 대구에 살아서 내가 같이 지냈고. 원래 방학 때 형한테 연락을 자주 했었거든.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내가 주유소 알바를 시작했어. IMF 터졌을 쯤이었는데, 시급이 1500원 정도 했나? 기름값이 점점 올라가니까 차들이 줄지어서 기름을 넣으려 했어. 아으, 그때 내가 기름 진짜 많이 넣었는데… 2주에 하루 쉬고 열심히 했지. 그게 내 고3 12월~2월이었어. 한창 일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졸업식 오라고 연락 왔더라고? 그래서 사장님께 졸업식 간다고 양해를 구하니까 5만 원이나 주셨어. 아직도 그분 얼굴이 생각나. 졸업식 참석할 겸 엄마를 만나러 갈 때 빨간 내복이랑 용돈을 드렸어. 하여튼 그랬어… 엄마도 나 대구 갈 때 돈 줬으니까. 내가 그 주유소에서 알바를 오래 하고, 잘하기도 하니까 사장님께서 월급제로 바꿔주셨어. 휴일은 똑같이 한 달에 두 번, 월급이 60만 원이었다. 나중에 집 근처 주유소로 옮겼지.”
“작은 삼촌 집에서 독립했구나? 그 집이 삼촌이 살았던 철도길 근처 주택 사글셋방이야?”
“맞아. 대구만의 특이한 전세 풍습이 있더라. 예를 들어서 월세가 20만 원이면 1년 치인 240만 원을 한꺼번에 내고 전세처럼 사는 거야.”
“아, 월세를 일시불로 내고, 그게 사라지는 전세금이 되는 셈인가? 따로 보증금에 들어갈 목돈 필요 없이?”
“어어. 주택 1층에서도 살아봤고, 2층에서도 살아봤지.”
“그 집에 나중에 ㅇㅇ삼촌(외삼촌 No.4)이 놀러 왔구나.”
“내가 그때 걔를 안 도와줬어야 되는데…”
“방위산업체 다닐 때 ㅇㅇ삼촌이 만든 빚을 떠안았다고 했잖아. 삼촌은 어떤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했어?”
“나는 원래 현역 1급이었는데 자격증이 있었으니까 산업기능요원이 가능했어. 당시 현역 월급이 적은데 집도 가난하니까 방위산업체 추천받아서 섬유공장에 갔지. 대구는 섬유공장이 많거든. 염색되어서 우리 공장으로 온 원단을 부드럽게 가공하는 작업을 했어. 염색 공장에서 바로 나온 원단은 빳빳해서 옷으로 못 만들어. 그래서 둘둘 말려온 원단을 한 50~60m로 자르고 큰 세탁기에 여러 번 돌려서 부드럽게 가공하는 거야. 가니까 파키스탄 사람들이 있더라고?”
“외국인 노동자랑 같이 일해?”
“응. 그 직원들이 20대 중후반 정도였고 내가 23살쯤이었는데, 내가 더 어려도 작업 반장으로서 통솔해야 해. 처음에는 텃세 아닌 텃세를 부리니까 내가 미친 듯이 일을 해서 능력을 증명해야 해. 작업량에 대한 권한을 내가 갖고 있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 방위산업체에서 첫 6개월은 엄청 갈궈진다 생각하면 돼. 근데 그 기간을 잘 버텨야 하지. 그걸 못 버티고 현역으로 가면 방위산업체에 있었던 기간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복무 기간을 채워야 하거든. 딱 그 6개월만 참으면 한동안 텃세는 안 부리고 말년 때 엄청 편해져. 처음에는 텃세였는데 나중에 다들 친해지는 거야. 직원들이 나한테 ‘보스, 보스.’라고 불렀지. 총작업량이 10타임이면 너무 힘드니까 9타임만 하자고 쇼부치려 하기도 하고. 맨날 일해야 되니까 너무 무리하기보다는 적절하게 조절하는 역할이지.”
“말년의 파워는 어느 정도로 세?”
“말년 작업 반장은 공장장이랑 파워가 비슷해. 거의 오더만 내렸어. 사장도 못 건드려. 얘들이 전역하고 뒤에서 그 업체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모르니까.”
“하루에 몇 시간씩 일했어?”
“거기가 원래 3교대였는데, IMF 터지고 주야 2교대가 되었어. 7~8명이 한 조가 되어서 12시간 동안 움직여. 오후 8시에 출근해서 아침 8시에 공장에서 나왔었다. 야식으로 안성탕면이랑 김치밖에 안 줘. 그거 먹고 버텨야 했지.”
“외국인이랑 같이 일해보면 어때?”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중국 사람들이랑 다 일해봤는데 재밌었어.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 남자들 뿐만 아니라, 지금 네 나이정도 되는 중국 여자 직원도 거기로 일하러 왔었어. 파키스탄 사람 중에 진짜 열심히 일한 사람 한 명이 특히 기억에 남아. 아직도 이름 기억하고 있어. 그 사람은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서 승용차랑 트럭도 있었지. 내가 전역하고 그 사람들이 귀국하고 나서도 국제전화까지 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그렇게 잘 지냈어. 이제 막 휴대폰이 생기던 때였는데도 자국민 커뮤니티가 다 있었어.”
“삼촌도 나처럼 재수하지 않았어? 방위산업체 가기 전인가?”
“재수했지. 내가 원래 공부를 평균 이상은 했거든. 특히 정치나 경제 과목을 잘했어. 고3 때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했지. 그러다가 졸업하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애가 캠퍼스가 어떻고 저떻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주유소 야간 알바하면서 수능 공부를 다시 해봤지. 결국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내 알바비로는 등록금을 낼 수가 없어서 포기했어…”
“삼촌이 집안 환경 때문에 많은 걸 포기했는데, 할머니한테 느끼는 감정은 뭐야?”
“엄마는 뭐… 엄마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잘 알거든… 감정이 크게 좋지는 않아. 맨날 큰아들만 챙기다가… 옛날부터 내가 그렇게 얘기했어. 내가 대구에서 큰형이랑 같이 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형을 잘 알잖아. 그때 형이 대구 섬유 공장을 나름 잘 다녀서 월급 100 받을 때, 내가 50 받았거든? 근데 나한테 집세 내라, 전기세 내라, 나중에 줄게… 맨날 그렇게 말하고서는 내가 한 번도 받은 적 없어. 형이 그 회사를 잘 다니다가 IMF 터지고 실업자가 돼서 시골에 내려올라 했어. 근데 내가 형을 그렇게 잘 아니까 엄마한테 큰형 도와주지 말라고 했거든. 뭐… 결과는 너도 알다시피. 엄마까지 말년에 돈 문제가 그렇게 됐잖아. 노령연금도 원리금 갚는데 다 들어가고. 그래서 내가 명절이나 휴가 때 시골에 내려가려 해도 가서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집이 아니니까… 아무리 자식이라도 가고 싶지가 않지. 큰형 안 도와줬으면 할머니는 지금 잘 살았을 거야. 그리고 내가 이혼하고 엄마한테 부산에서 지내면서 내가 출근한 동안 애기 좀 잠깐 봐달라고 부탁했을 때, 하루 만에 터미널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 영향도 그렇고. 애한테 손 많이 갈 때 할머니가 봐주고 했으면 내가 모시고 살았겠지. 너도 몇 번 ㅇㅇ(외삼촌 No.3 아기)을 봐줬는데, 솔직히 지금은 손 많이 안 가잖아?“
“애가 화장실 혼자 가고, 차려주기만 하면 밥도 알아서 떠먹고, 힘든 건 없었어.”
“그래서 엄마한테 애 많이 컸으니까 잠깐 놀러 와서 며칠 쉬라고 몇 번 얘기했는데, 엘리베이터 탈 줄 모른다, 길 헷갈린다 등등 거절만 해. 하나씩 가르쳐준다고 해도 싫어하고. 내가 혼자서도 집안일 다 했는데, 엄마 계신다고 아예 안 할 사람도 아니고. 애 학교 다녀와서 간식 한 번이라도 챙겨주면, 이 아파트에서 시골 집보다 쾌적하게 살고 병원 다니기도 좋은데… 엄마는 귀찮겠지 뭐.”
”본인 삶에 어느 정도로 만족해? 1~100 숫자로 표현한다면?“
“한… 많이 쳐줘도 60~70? 60 정도인 것 같아.”
“삼촌은 삼촌으로 다시 태어나서 살고 싶어?”
“지금 내 삶을 똑같이 겪어야 한다면 안 태어나고 싶어. 고생과 희생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만약에 내 인생에서 어느 사건이나 선택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삼촌은 어디를 어떻게 고치고 싶어?”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음… 내가 대구에서 주유소 알바하면서 자취할 때, ㅇㅇ이(외삼촌 No.4)가 시골에서 처음 대구로 왔을 때, 걔를 시골집에 다시 보내고 싶다. ‘야, 우리 집에 놀러 왔다며. 언제까지 있을 거야? 이제 집에 다시 내려가. 니 알아서 살아.’라고 하고 싶어. 그랬으면 걔가 만든 빚을 내가 갚느라 20대를 포기하진 않았겠지. 걔도 큰돈 들어갈 일 안 생겼을 거고. 내 인생이 많이 바뀌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