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To do list 작성하기
몇 년 간 늦은 야근으로 새벽녘 귀가해 잠들기 전 난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나만이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조차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 정신은 마비되어 있었다. 2020년은 터닝포인트가 되어야 한다는 붉은 알람이 머릿속에 울렸다. S.O.S! S.O.S!
4년 여를 다닌 직장에서의 갑작스러운 인사이동과 골절사고가 연이어 벌어졌고, 정신이 산란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정신과 신체에 이상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의 삶에서도 힘들었던 큰일을 겪고 난 이후 순차적으로 몸과 정신은 망가졌고, 세상에 좀처럼 단련되지 않는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결론으로 치달아 몇 년 동안 나 자신을 미워만 했다. 적당히 흘러가는 괴로운 나날이 지나고 지나 2020년 큰 사건들이 빵빵 터지고 나서야 그 누구도 나를 돌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만이 나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다.
이번 설 연휴 내내 스케줄이 없을 땐 누워만 지냈다. 불 꺼진 방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이불속에 갇혀 그렇게 누워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무기력함은 나에게 독이다. 그러나 좀처럼 침대 밖으로 나갈 힘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이렇게 마지막 날, 집 앞 스터디 카페로 나섰다.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몰라, 30시간짜리 정기권을 끊었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보는 거지.
2020 pilot의 to do list
퇴사하고 이직한다 - 포트폴리오 정리할 것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과 사진을 편집해서 추억을 본격적으로 남기기
친구들을 인터뷰한다
가족 여행 가기
기타 다시 치기, 음악 녹음 하기
무비 나잇 혹은 무비데이
카카오톡에 얽매여서 상대의 답을 기다리지 않기
엄마 아빠와 달마다 영화 보러 가기
퇴직금의 70%는 건드리지 않기
동네 커뮤니티센터 운동 끊기
런데이 하기(일주일 3회)
애플 워치 구입
운전면허 따기
올해, 이 리스트에서 몇 개를 이뤄낼 것일까? 사실 몇 가지는 단순히 행하면 될 일이다.
나의 경우는 우선순위라기보다는 여태껏 살면서 계속 미뤄왔었던 일들까지도 포함된 리스트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이 리스트는 즉흥적으로 작성했었기 때문에, 언제든 내용이 추가될 여지가 있다.
퇴사하고 이직한다.
'?월까지는 반드시 버틴다!'라는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곧 폭주기관차가 되어 미친 듯이 퇴사라는 종착역으로 달려갈 수 있는 상태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어른스러운 마무리는 언제나 어렵다.
산티아고 순례길
내가 올해 초 생각한 내 삶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삶에 대한 크고 그럴싸한 의미를 찾고자 순례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를 단순한 시험에 들게 하고 싶다. 괴롭고 외로울 수 있는 고된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원초적인 고통과 괴로움에 마주하고 싶다는 것이다. 삶은 생각보다 더 복잡해서, 생각보다 내가 겪는 아픔들은 원초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들. 내 삶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남들과 비교하는 나 자신이라던지, 그런 것들이 괴로웠다.
좀 더 나 자신이 갖고 있을 원초적인 고통을 마주하고 싶다. 다양한 고통들에 대한 내성을 쌓고 싶다.
영상과 사진을 편집해서 추억을 본격적으로 남기기
이건 매 순간 들을 촬영하고 있기는 하는데, 가지고만 있지 편집을 하거나 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꽤 여러 영상들을 많이 찍어두고 유튜브 개인 계정에 비밀로 올려두기까지 했는데, 생각보다 그 영상은 찾아보질 않게 된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매년 쌓여가는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 쪼개져있는 영상들을 잘 정리하고 싶다.
모든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타입이라, 있는 힘껏 내 소중한 사람들의 어떤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기고 싶다는 생각뿐인 것 같다. 할머니 영상을 많이 찍으려고 노력했었던 것도,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나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난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재생하는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에서 울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귀로는 들을 수가 없다.
올해는 꼭 내 소중한 사람들의 순간순간들을 잘 담아내 정리할 것이다.
친구들을 인터뷰한다
어떻게 디테일하게 실행할 수 있을지는 좀 더 내용을 구체화시켜 봐야 할 것 같지만, 그냥 단순한 '호구 조사'로 끝나는 콘텐츠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의 내가 모르는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란 생각과 인터뷰 대상으로 개인과 개인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평소 나누는 대화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으니 꽤나 흥미롭지 않을까? 란 단순한 생각이다. 나는 기자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조금은 다른 포지션으로 깊이 있게 내 주변인들을 마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획 같다.
가족여행 가기
애석하게도 우리 가족은 그럴싸한 여행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모두 같이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도 했고, 집의 안정을 찾기까지도 꽤나 많은 굴곡을 거쳤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함께 누리지 못해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올해는 짧게, 무리해서라도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기타 다시 치기, 음악 녹음 하기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부터, 20대 초-중반에는 열심히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놀았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기타에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상태다.
이전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마음,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계획을
to do list에 포함시킨 것 같다.
무비 나잇, 무비 데이
혼자 살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집에서 보는 일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보고 싶다.
카카오톡에 얽매여서 상대의 답을 기다리지 않기
최근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누군가와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연락 문제까지 이어져서 혼자 초조해지는 것이 부지기수. 올해는 연락과 관련해서 목매고 싶지 않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신감, 자존감이 깎여나간 대가로 내 주변인들을 괴롭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2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순례길을 떠나게 되면 차근히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엄마 아빠와 달마다 영화 보러 가기
부모님은 영화 보는 것을 꽤나 좋아하신다. 그 피가 이어져 나 또한 취미가 영화 감상이다.
영화 감상은 누군가와 함께하느냐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 한 편씩은 엄마 아빠를 모시고
영화관에 찾아갈 생각이다. 엄마는 혼자서도 영화관에 잘 찾아가는 편이지만, 아빠의 경우는 혼자 취미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편이라 함께 하고 싶다.
퇴직금의 70%는 건드리지 않기
퇴사를 하게 되면 퇴직금이 나올 테고, 이 금액의 70%는 묶어두고 절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소비에 대한 개념이 약간 부족한 편이라, 한계치를 걸어놓고 자금을 운용하는 편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알맞다. 한 푼도 안 쓰기엔 조금 어려운 상황 같기 때문에, 70%로 걸었다.
동네 커뮤니티센터 운동 끊기
현재는 건강문제로 운동을 끊기 어려운 상황이라,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바로 밑에 있는 헬스장을 끊을 생각이다. 이번엔 내 것을 끊으면서 아빠도 같이 운동할 수 있게끔 할 생각이다. 순례길을 걷기 위해서는 체력 단련을 해놔야 하니까.
런데이 하기(주 3일)
이것 또한 지금 당장 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뛰고 걷는 움직임이 지금 불가능한 상황이라, 몸 회복하는 것이 먼저! 런데이를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나서 지속할 수가 없지만, 꽤나 좋은 앱인 것 같았다. 올해는 신체의 건강, 정신의 건강 둘 다 잡는 한 해가 되고 싶다. 너무 거창한가? 시도하는 게 어디냐... 싶다.
애플 워치 구입
이건 사고 싶으면 사면 그만인 건데, 왜 리스트에 넣었을까. 조금 더 간을 보는 중이다. 공짜로 생긴 스마트 워치 저렴한 게 있어서, 이것부터 잘 활용한 이후에 구매를 생각하자 싶어서 일단 리스트에 추가했다.
운전면허 따기
운전면허는 많이들 일찍 따는데, 나 같은 경우엔 운전면허를 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내가 운전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이 동네의 사고 왕이 될까 봐 뚜벅이 생활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 아빠한테 운전을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
아빠 딸이니까 운전 잘하겠지 뭐. 이런 생각이 지금은 들어서 긍정적이다.
인사이동으로 면담을 하는 도중 '동기부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반드시 누군가 한 명은 이동시켜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인사이동을 좋은 쪽으로 바라보라는 뉘앙스, 내 상황에 잘 맞춰 얘기하더라. 나중엔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회사도 어차피 내 얘길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거든.
면담을 진행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to do list를 작성했다. 그렇게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던 밤이 너무나 길고 지루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게 있다니 다행이다.'
내 속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열망이 5개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작성했다.
재밌게도 올해 하고자 하는 것이 14개나 된다. 그래서 올해도 살아가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늘 하고 싶은 말 하나. 같이 살아가요, 우리. 2020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