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마음만은 따듯하게 만들어준 사람
저에게 육아 그리고 육아휴직을 선물해 준,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너무 힘들었지만 육아가 얼마나 힘든 일이며, 남자도 자녀양육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고마운 사람.
자, 그녀를 만난 추운 겨울로 돌아갈게요.
“소개팅해볼래?”
두 살 연상인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은 친한 직장선배의 소개였어요. 평소 저의 모습을 눈여겨보아 소개해주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에 저는 난감했습니다. 제 직장상사는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신 분 이셨어요. 언제 웃어보았을까 하는 날카로운 인상에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신입인 저를 잔뜩 겁먹게 했기 때문에, 아직도 상사님을 대할 때면 손에 식은땀이 날 정도입니다. 업무에선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고, 상사님과 추억은 대부분이 혼난 기억뿐인데 저의 어떤 면을 보시고 소개해 주셨는지 알 길이 없네요. 잘못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든 사람은 제 아내가 처음이었어요. 갈색빛이 나는 머릿결 하며 시원스러운 목소리, 이에 어울리는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바라보자 그만, 얼굴을 붉혔습니다.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저녁시간에 만났기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막상 가게에 들어갔지만 무엇을 주문할지 몰라 코스요리를 시켰네요. 생각보다 양이 많기도 하고 긴장도 된 터라 쉽사리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제가 다 먹어도 돼요?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해서요.”
“아, 저는 배가 좀 불러서....... 그렇게 하세요.”
제 아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남은 음식들을 자기 접시로 가져가 깔끔하게 비워 냈습니다. 저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더군요.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었기에 상대방도 호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았나 봐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제가 마음에 들었으면 남은 음식을 먹는데 정신이 팔려 저와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내는 먹기만 하고 저는 바라만 보았으니까요.
아내는 프리랜서 강사입니다. 일이 생기면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출강을 나가죠. 주로 맡는 주제는 해외취업입니다. 강사를 하기 전 직업은 ‘크루즈선 승무원’이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물어보니 미국에서 제일 큰 크루즈 회사인 로열 케리비언 한국인 최초 승무원이라며 말해준 기억이 있네요.
“잠시 만요,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될까요?”
아내는 정중히 양해를 구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외국인이었나 봐요. 다른 사람이 듣기엔 그저 사무적인 대화였지만, 영어 울렁증이 있고 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을 동경한 전, 이 모습에서 결정적으로 아내에게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모르지만, 영어로 말할 때 나오는 눈빛이 있어요. 평소보다 더 또렷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제가 부담스러운지 급히 전화를 끊네요. 다시 어색한 침묵 속에 식사를 마쳤습니다. 각자 일정을 확인하고 다음 약속을 잡았어요. 저는 모든 주말이 한가하였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번 만남도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만났는데 다음 약속은 한 달 뒤에나 가능하지 뭐예요. 그것도 아내가 배려해서 만든 시간이라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일정이 있던 그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첫 소개팅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인사를 보냈어요. 제가 좋아하는 글귀에 가벼운 아침인사를 담아 보냈습니다. 매일 문자를 보냈죠. 첫 만남 이후 다음이 길어지면 보통 쉽게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늘 경험한 터라 어떻게 해서든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문자 중 절반 이상은 답장이 늦거나 없었어요.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하지만 계속해서 그녀의 관심을 사기 위해 아침마다 연락을 했습니다. 이것도 한두 번 겪다 보니 익숙해지더군요. 아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노력만 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저의 정성 덕분인지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고, 처음보다는 아내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저는 세 번째 만나는 날 고백을 했습니다.
거절하면 어쩌나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그때가, 인생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숨 가쁜 순간이 아니었나 하네요.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는 저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권유에 못 이겨 사귀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말로 들려 서운했지만, 내가 더 잘해서 마음을 돌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연인으로서 첫날을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제야 진짜 인연을 만났나 하는 마음에 늘 어려워하던 일도 쉽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생각만으로 힘이 나게 하는 그녀는 그렇게 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죠.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가장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싶다가도 어떻게 보면,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 뒤, 대학로에 있는 어느 극장에서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이듬에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던 1월, 아름다운 예식도 올리게 되었죠. 저도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