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좋아한다. 기억하는 한 어릴 적부터 그랬다. 가까운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 다니는 것이 편했다. 지금도 다른 동네에서 일정이 있을 때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몇 정거장 전에 내려 종종 낯선 동네를 걷는다. 두 발로 낯선 곳을 걷다 보면 때로는 선물 같은 장소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대부분 꽤 좋은 기억들로 남아있다. 직장을 쉬며 이른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작정 산책부터 시작한 것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가끔 산책만으로는 걷기의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트래킹을 한다. 처음에는 서울 내의 산이나 둘레길을 걸어 다녔는데, 직장을 쉬며 비어 있는 시간 동안 전국의 산들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 가을, 큰마음을 먹고 주왕산에 다녀왔다. 밤에 이동해서 새벽부터 아침까지 걷는 코스라 걱정이 앞섰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주왕산의 멋있는 가을 절경을 상상하며 홀린 듯 야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막상 가보니 주왕산은 트래킹보다는 하이킹에 가까웠다.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 3대 암산으로 불리는 만큼 가파른 경사가 나를 반겼다. 전날에 비가 온 터라 축축하고 미끄러운 돌들을 조심히 밟았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광부들처럼 랜턴으로 어둠을 밝히며 산을 오르자, 잠에서 깬 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랜턴으로 달려들었다.
산은 매우 조용했다. 새벽은 거기에 있던 산도, 그곳을 걷는 사람들도 숨죽이게 했다. 물줄기마저 거기에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점차 어둠이 눈에 익었다. 다양한 층위의 어둠이 색을 달리하며 슬며시 풍경을 내밀었다. 밤하늘 밑 산등성이들 사이로 넓은 운해가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어디엔가 떠 있을 배를 생각하며 하늘에 박혀있는 수많은 별을 봤다. 나는 아주 아주 작은 존재가 됐다.
어둠 속에서 그곳에 있어 온 것들을 생각했다. 돌과 흙, 나무, 그리고 산의 모든 것들. 내가 있기도 전부터 있어온 것들이기에 나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것들.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간 속에 그들을 지나온 수많은 체취를 그렸다. 어둠 속에서 별은 유난히도 밝았다. 평소엔 눈에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지만, 별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어 왔을 것이다. 별들을 보며 나는 내가 모르게 지나온 긴 시간을 상상했다.
해가 뜨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랜턴을 들고 올라가 새들이 깨는 시간에 내려왔다. 날이 밝아지자 거대한 암석과 키가 겅중 하고 두 팔로도 안아지지 않는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상상만 하던 것들이다. 수백 년 전부터 그곳에서 그들이 보냈을 수많은 계절을, 시간을 생각했다. 길가에 드러나 반들반들해진 뿌리와 돌들은 그 나무와 돌들이 그곳에 있어 왔음을, 수많은 사람이 그곳을 지나왔음을 알리는 증거일 것이다. 시간은 그곳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걷기에 대해 생각한다. 걷기는 언제부터 내게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데리고 전국의 산을 돌아다녔다.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건 걷기를 좋아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부모님의 흔적이 시간 속에 내게 남긴 것이었다. 그곳에 있어 온 산처럼, 걷기는 내게 예전부터 있어 온 것 중 하나였다.
앞으로 있을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는 앞으로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걷기를 좋아하는 나와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만났으니,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미래에게는 어떤 체취가 남을까 궁금해진다. 걷기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은 어느 쪽이든 괜찮을 것 같다. 다만, 나와 남편이 남길 시간의 흔적을 다정하게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