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by 허필선


나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내가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먹는 것에서부터 오전에 모임을 나가서 사람들과 만나고 저녁에는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가기로 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왜 아침에 커피를 먹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 커피포트의 단추를 습관적으로 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오늘 꼭 커피를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상의 반복으로 어제에 한 일들을 반복처럼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교에 데려다 주고 부모 모임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내가 그 자리에서 있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의미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례적으로 커피숍이나 빵집에 가서 수다를 떨고 있지는 않는가? 처음에는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며 참여를 했던 모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가두어놓는 하나의 틀처럼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단톡방에 들어가고 강좌를 들으러 가지만 과연 이것이 나에게 짐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다 보니 도움도 안 되고 의미도 퇴색해가고 더 이상 발전 가능성도 배울 점도 없는 모임이 무의미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하는 일들은 대부분은 분명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 첫 시작은 나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선택과 믿음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와 의심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질문들도 잊어버린다. 마치 책 바퀴 돌듯이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된다.

잠깐 멈추어 보자. 그리고 한번 질문해보자.

나는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걸까?

그 일을 정말 해야 하는 일들일 것인가?

이것이 나의 선택이 맞기는 한 것일까?

비록 처음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려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빠져 있는 움직임이 되고 누군가에게 이끌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내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체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해봐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고 나로부터의 시작이 되지 않은 행동으로 만들어진 삶이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지속할 수밖에 없다면 과연 그런 행동이, 관계라는 것이 나의 삶보다 소중한 것인가? 나의 선택이 결여된 행동은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이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의미 또한 결여되어 있다. 어떤 행동을 하며 ‘내가 이 의미 없는 행동을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당장 멈춰 서야 한다. 의미 없는 행동은 의미 없는 시간 소비를 가져오고 정작 내가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 시간에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고 못하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못하면서 남들이 하자고 해서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낭비인가? 우리는 그렇게 불필요한 행동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살고 있다.

나의 선택으로 가득 찬 삶을 산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사건을 접했을 때 누군가 만들어놓은 정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남이 결정 내려준 답을 따르는 것이 아닌 내가 생각하고 내 안에서 찾아낸 답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의 시작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내 자신에게 하는 질문을 통해 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나에게 질문을 하고 찾아낸 답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남 탓을 할 수가 없다. 내 선택이며 나의 답이기에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내가 지고 가게 된다. 실패를 해도 나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 성공을 해도 나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나의 생각을 ‘같아요’로 표현할 수 없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투에서부터 알 수 있다. 점심시간에 메뉴를 고르기 위해서 물어보면 “나는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면 항상 ‘미역국’이라고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대답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분명하던 것들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언젠가부터 자신의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대답을 하면서 ‘~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을 하곤 하는데 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마저 명확히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인 것 같아요.’로 표현될 수는 없다. ‘나는 ~을 좋아합니다.’,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결론 내리는 힘이 약해져 있다는 것이다.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무엇이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내 삶에 나만큼 전문가인 사람은 없다. 나의 대답은 결국 내가 내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고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삶에 적용되는 것이지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경험과 환경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나의 삶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편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조언을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또한 내가 판단을 할 때도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살고 다른 사람의 결론을 쫓는 삶을 살아봐야 돌아오는 것은 내 삶의 피폐함뿐이다. 내 삶에서 온전한 주최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결국 삶의 방향을 잃고 휘청거릴 뿐이다.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여야 한다. 그럴 때만이 나에게 맞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나만의 삶의 방향을 세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의 삶을 살면서 언제까지 이유도 모르는 일들을 하고 살 것인가? 이제 그만할 만도 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얘기에 따라 휘청거리는 삶은 그만두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면 과감히 손을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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